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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접어들 무렵 아내는 순산했다.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다. 나는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안겨주는 아이를 받아들었다. 아내는… 왠지 모르게 조금 그 모습을 보면서 불안한 얼굴을 드리웠다. 아이는… 왠지 모르게 아내를 쏙 빼닮은 것 같았다. 내 피는 섞이지 않은 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누구나 다 사랑스럽다. 나는 아이에게 미소를 보여주며 한번 안아서 다독인 다음에 아내의 품에 다시 돌려주었고, 아내는 그제서야 조금 안도한 표정이었다.
 
아내는 내심 내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가진 아이에 대해 불쾌해하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다. 나도 솔직히 아이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내가 낳은 아이이기에, 나는 그 아이도 내 아이라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 너무 심하게 했던 일 때문에 아이에게 영향이 가지 않았을까 싶어 되려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여전히 전처에게는 전처라는 말이 영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아내라고 말했고, 그것에 아내는 또 조금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내도 참 많이 변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예전에는 도도하고 오만하면서 사람 신경 긁는 히스테릭한 성격이었는데, 지금은 종속적이고 의존적이면서 비굴하리만큼 몸을 낮추고 굽신거리고 있다. 그리고, 애정 부분에 있어서도… 여왕님 같던 이전 모습은 간곳이 없고, 지금은 정말로 자학적인 변태 노예가 따로 없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임신 도중에 자제하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하도 달라붙어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확인받으려고 해서… 아내의 후장은 정상생활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각종 괴상한 도구와 의상들을 가지고 와서 내게 소유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 받으려고 집착한다. 그런 아내의 변화의 배후에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녀석이 있었다.
 
“강제로 시키지는 않았어요. 아무리 그래도 임산부한테 그런 걸 시킬 수 있을리가… 처음에 불씨만 던져주고 그 이후로는 전부 다 본인 아이디어에요.”
 
“불씨를 던진 시점에서 네가 진범 맞잖아.”
 
“어드바이스는 했지만 의지는 당사자의 몫이라고요. 저는 그냥 현실적인 이야기만 했어요. 이전에 결혼 시절에 굴던 버릇을 그대로 가지고 가면, 같은 이유로 이번에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버림받을 것이라고요. 그러니, 곁에 있고 싶다면, 이전에 자신은 포맷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라. 그렇지 않고서는 다시 아이와 함께 홀로 남겨질 것이다. 그때는 나도 못도와준다. 그게 다에요. 근데 의외긴 하네요. 저 정도로 자기 자신을 정말 다른 사람으로 개조하다니… 전에 제가 사모님이라 불렀던 시절이 인지부조화를 일으킬 정도네요.”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아는 여자들 중에서 가장 독한 사람이 아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행 착오를 겪을지언정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손에 넣고 만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 원래부터 그랬다. 그래서, 나와 결혼 생활 중에도 이전에 사랑했던 남자를 그토록 오래 잊지 못하고 거기만 바라보다가 결국 원하는 것을 이뤘지. 그리고, 지금은 그 원하는 것이 나로 바뀐 것 뿐이다. 조금만 일찍 그래줬으면 좋았으련만…
 
그랬으면, 아마도 짧은 시간 내게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여난도 벌어지지 않고 우리는 그냥 고만고만한 부부로 조용히 살아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나쁜 건 아니다. 뭐라고 해도, 두번째로 출산을 하고 나서도 절세 미모를 유지하는 아내가 남자들의 섹슈얼 판타지를 만족시켜주는 역할에 몰두하고 있고, 생활도 아내의 돈에 손대고 있지는 않지만 뭔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든든한 기분이 들게 하니깐. 거기에 이번에 아이까지 낳아서 나름 행복한 시간이 된 것 같다.
 
그러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괴이하리만큼 여자들이랑 많이 엮였지만, 의외로 아직까지 내게 변화한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서류상으로는 나는 여전히 싱글이다. 아내와 이혼 후 그 누구도 혼인 신고를 하지는 않았으니. 그리고, 아이도 오로지 내 아들 태현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의외로 아이 소식은 생각보다는 없었구나. 뭐, 그것에는 나름 이유는 있었다. 아내야 말할 것도 없이 임신중이었고, 설령 그 이후라도 태현이에게 볼 낯이 없다며 더는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처남댁도 마찬가지다. 이런, 아내와 마찬가지로 이쪽도 여전히 처남댁이란 말이 잘 안떨어지네. 아무튼, 그녀도 아이를 더 가지는 것은 거부했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태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태현이 엄마로서의 역할에 전념하고 싶다고 말하며, 나와의 사이에서 다른 아이가 태어나 아이를 소외된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조금 감동적인 말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이를 기반으로 해서 자신이 나에 대해서 절대적 우위를 가졌다는 주도권을 놓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덕분에 아내는 졸지에 몹쓸 엄마로 되어 더 마음 고생했다. 다행히도 나중에 굽신굽신해서 태현이를 다시 만날수는 있었다. 그래도 아이에게 설명을 잘해주었는지, 아이는 오랜만에 만난 생모… 자신을 두고 떠나서 다른 동생을 안고 볼낯이 없어하는 엄마를 보고 그냥 어른스럽게 안아주었다. 아내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울었고 녀석은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나름 감동의 물결이 파도치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아내는 세경이 외에 더 눈치를 봐야 하는 상대가 생겨서 마음 고생이 심한 모양이었다.
 
나디아도 아이를 원치는 않았다. 우리 집 별채에 들어온 이후 그녀와의 관계는 소박하게 이어졌지만, 그녀는 그 정도의 선에서 만족하는 듯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겪어봤기에 더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이곳에 조금 힘들게 살아갈 운명을 가질 아이가 태어나는 걸 원치 않았다. 나는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였고 대신에 그녀의 모녀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에 가능한한 편견없이 살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녀는 요즘들어 인지도가 더 올라서 조금 유명한 곳에서도 연락을 받는 모양이지만, 지나친 활동은 자제하고 있다.
 
덕분에 신비성이 더 붙어서 상종가를 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사적인 부분이 드러나는 정도의 관심을 원치 않았고 그저 취미와 세상에 대한 소통으로서만 그것에 전념했다. 나는 종종 그녀의 잘나온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미소지었고, 그녀는 그런 나의 미소에 쑥쓰러운 반응을 보이며 어께에 기대었다. 아무튼, 그렇게 엄청난 짓들을 많이 저질러 버린 것 치고는 생각보다는 큰 변화 없는 시골과 서울을 오가는 일상이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갑자기 변화를 맞으리라 생각치 못했다.
 
“오늘 야근 좀 가능하실까요?”
 
오랜만에 듣는 우리만의 암호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나는 세경이를 바라보았다. 결제 서류를 내민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뭐지? 이제는 아내 집으로 들어간 다음부터 모텔을 따로 잡고 시간을 보낼 일이 없을텐데… 그 짓도 아내 보는 앞에서 태연하게 하는 녀석이 따로 장소를 잡고 밀회를 해야 할 이유가 뭘까? 나는 조금 당황하였지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미소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나는 예상치 못한 녀석의 제안에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다. 
 
오랜만에 들어온 자주 애용하던 모텔은 조금 생소했다. 항상 그렇듯이 녀석은 먼저 들어와서 방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것이 조금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미 먼저 와서 샤워를 마쳤을 그녀…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조금 전 사무실에서 봤던 정장 차림 그대로 호텔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중요한 용건이 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녀석은 애둘러 말하지 않았다.
 
“임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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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완)

솔직한 첫번째 심정은 당황스러움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녀석이? 자기 관리에 철두철미한 이 녀석이 임신을 했다는 말에… 나는 이게 사실인지 농담인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진지해 보였다. 나는 그제서야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도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죄송해요.”

“어? 아니… 그런 말이 어딨어. 죄송하다니… 솔직히 좀 당황스럽기는 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평소에 너라면 그런 일과 무관하리라 생각했거든. 하지만, 죄송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불편하거나 하는 건 아니야. 정말이야. 그렇게 비겁하게 굴 생각 전혀 없어.”

나의 다급한 말에 그녀는 조금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뇨, 제가 죄송하다는 말은… 여자 임신시키고 나몰라라 하는 남자들 임신을 빌미로 매달리거나 한몫 잡으려고 협상할 때 의례히 꺼내는 서두 같은 말로 죄송하다고 한 거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다고 하는 건… 이제 과장님을 더 모실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는 거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떠난다고? 그건… 조금 간단한 상황이 아니다. 그녀가 돌아갈 곳이 남편이라면 이건 대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일텐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남편에게… 갈꺼야?”

“네. 맞아요.”

“괜찮은거야? 말투를 보니 내 아이인 모양인데… 남편이 알면…”

“알아요. 자기 아이 아니라는 거. 그 사람… 불임이래요.”

더는… 대화를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머리 속이 너무 복잡해져서. 그래서, 얼어붙은 나에게 그녀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실수일지도 모르겠네요. 임신한 도영씨를 보고선 조금… 부럽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떤 관계든간에… 아이를 가지고 그 아이를 지키려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전에는 저는 그런 것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어요. 글러먹은 인생, 아이를 굳이 가져서 대물림하는 건 사회적 손실이라고 생각했죠. 남편도, 그런 생각에 공감해주는 사람이었기에 결혼해도 좋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과장님과 관계를 가지는 와중에도 관리를 철저하게 했었죠. 그런데… 임신한 그녀를 보고 마음에 동요가 왔어요.

조금 고의적으로… 실수를 했어요. 그리고 생겨버렸죠.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뭔가 아이를 가진 이전과 이후가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아이를 계기로 저도 세상에 몸 험하게 굴리는 여자가 아니라, 한 아이를 지키는 엄마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난감해졌어요. 아시다시피 이 아이는 틀림없이 과장님의 아이죠. 그러니… 남편에게는 납득되지 못하리라 여겼어요. 그래서, 아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와는 결별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에게 갔어요.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설명했어요. 이미,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경악하리라 여겼죠. 많이 놀라더라구요. 그리고, 놀라는 그에게 말했죠.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다. 하지만, 당신의 아이도 아니고 당신은 아빠가 되고 싶어하지 않으니 더는 당신 곁에 머물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떠나야 할 것 같다. 원한다면 분이 풀릴만큼 나를 때려도 좋다. 하지만… 보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했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뭐래?”

“울더라구요. 울면서 미안하다고 말하더라구요.”

뭔가… 여전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고백하더라구요. 사실은… 자신이 불임이라고요. 지금까지 속여서 미안하다고요. 전에 일했던 화학공장에서 몸을 많이 망쳤는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고요. 그래서 아이 따위는 필요없다는 듯이 굴었지만… 사실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걸 알면 제가 떠날까봐 거짓말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저를 붙들고 울면서 말하더라구요. 거짓말해서 미안하다고요… 그리고, 제발 떠나지 말아달라구요.

누구의 아이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저를 통해서 우리에게 온 아이라면 자기 아이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고요. 그래서… 맹세하건데 좋은 좋은 남편이 되겠다고요. 그러니, 자기가 싫고 아이의 아빠를 사랑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이만이 문제라면 떠나지 말아달라고 흐느꼈어요.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그런 선택을 할만큼 남편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저를 방치한 것에 대해서, 용서해달라고 말하더라구요.”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 상황이 정말로 감정이 격한 상황이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걸 입증하듯, 그녀는 혼잣말로 말했다.

“바보 같은 사람… 바람피운 건 난데 왜 자기가 사과를… 정말이지… 한심해서리…”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눈시울도 조금 젖어들었다. 그리고, 나는 마음 속으로 단념이라는 의미를 떠올렸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알 것 같다. 나는 어느 정도 결론을 예상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남편… 두고 올 수 없는거지?”

“그러게요. 저도 참 스스로 이해가 안가요. 마음만으로는 과장님 쪽이 더 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답이 안나오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람… 두고 떠날 수가 없겠더라구요. 아마도 이런 것이 부부란 걸까요? 맨날 싸우고 툭닥거리면서도, 서로 헤어지려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인연… 죄송하지만, 과장님이 이번에는 제 남편에게 지셨어요.”

나는 그녀의 농담에 조금 미소지었다. 그리고… 되도록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래…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그래야지… 나 같은 아저씨보다는 연하의 잘생긴 젊은 남편이랑 알콩달콩하게 살아야지. 뭐… 아이에 대해서 내가 트롤링을 해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축하해. 좋은 결말이네…”

“의외로… 깔끔하시네요. 조금은 아쉬워하시리라 생각했는데… 나름 총애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요?”

“총애라… 도와준 것들은 고맙지만, 만만치 않게 사고도 쳤잖아? 뭐, 그건 농담이고… 아쉬워. 많이 아쉬어. 내가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너는 모를꺼야. 하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생각은 했어.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웃으면서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여기서 머무는 건 너에게 너무 손해야. 그러니깐… 눈물나게 안타깝지만 그래도 웃으며 보내줄께.”

나의 말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가왔다.

“회사에는… 곧 출산휴가를 낼꺼에요. 하지만 휴가를 마치고 나서도 복귀하진 않을꺼예요. 그대로 퇴사할거에요. 남편도 이제 내근직으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니 앞으로는 당분간 전업주부가 될 것 같아요. 회사를 떠나는 날… 과장님과도 이별하게 될꺼예요. 하지만, 그날은 그냥 서로 웃으면서 헤어지기로 해요. 그걸 위해서… 오늘 미리 말씀드렸어요.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과장님이 있어주셔서 저에게는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끝까지 모시지 못하고 떠나는 걸 용서하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줬다. 그리고 말했다.

“나도… 지금까지 너무 고마웠어. 어디를 가서든… 행복하기를 기원할께. 그리고, 너를 영원히 잊지 못할꺼야. 지금 너를 잡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서 마지막까지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일꺼야. 부디… 행복하기를 바라. 그리고 내 아이도 잘 키워주기를 바라고… 그리고 이제 다시는… 남편 외에 다른 사람 바라보지 말고 그냥 그 사람과 사랑하면서 살아. 그게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내 마지막 진심이야…”

나는 조금 눈씨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정리해야 했다.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아내와의 불화로 방황하던 시시부터 내 버팀목이 되어주고, 이혼 후에 내게 의지할 곳이 되어주며, 상황마다 항상 자신의 욕심이 아닌 나에게 좋은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조언하고 조력해준 그녀…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솔직히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되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더 쓰라렸다. 그런 나에게… 그녀가 말했다.

“저도… 고마워요. 감사해요… 그리고…”

거기서 그녀는 내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

생각해보니 처음… 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을…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미소지었다. 이별의 키스는 그리 길지 않았다. 아직 그녀가 떠나려면 몇일이 더 남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키스라는 사실을… 그렇게 우리는 조금 이른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원한다면 마지막 해후도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마다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왠지 모르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애써 미소짓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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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게 갑자기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아악!!!”

아내는 갑자기 세경이가 날린 싸대기를 맞고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녀는 억울한 표정으로 세경이를 쳐다보는 데 세경이는 진지한 얼굴로 아내에게 말했다.

“긴장하라고 때린거야. 이제 과장님은 당신의 몫이라고… 언제까지 나한테 의지할건데? 아직도 정신 못차렸어? 그렇게 응석만 부리다가는 순진한 얼굴로 사람잡는 그 암퇘지한테 계속 휘둘리게 될꺼야. 정신 똑바로 차려. 이제 당신은 몸종 아니야. 전처라도 아내야. 불리한 싸움이라고 그냥 징징거리기만 할꺼야?”

그녀의 말에…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제가 또 실수를… 알았어요. 명심할께요.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 노력할께요. 그리고… 혼자서 설 수 있도록 힘낼께요. 하지만… 이것만은 꼭 말하고 싶어요. 고마웠어요. 아이 가진 동안 옆에서 도와준거… 그 은혜 평생 잊지 않을께요. 쓰디쓴 조언과도 함께요…”

아내의 말에 세경이는 웃으며 아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존댓말쓰지 않으셔도 돼요. 사모님… 그 동안 실례가 많았어요. 부디 노여웠더라도 용서하세요.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로 잡은 손 놓치지 마세요. 저는 이제 제 자리로 돌아갈께요. 그 동안 즐거웠어요.”

아내와의 작별은 그녀의 마지막 출근의 배웅이었다. 그렇게 아내와 작별한 세경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회사로 출근했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업무를 보았고, 후임자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하였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되자, 주변에 사람들에게 출산휴가에 대한 인사를 하며 사무실을 돌아다녔다. 다들, 유능했던 그녀의 휴직에 아쉬워 했다. 그리고… 나에게도 인사를 하러 왔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게 나에게도 직장 동료로서 인사를 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과장님…”

“그래요. 가서 잘 쉬고 순산하기를 바랄께요.”

나는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간단한 악수… 그것이 나와 그녀의 작별이었다. 그녀는… 처음 나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것처럼 사라지는 것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따로 배웅하지 않았다. 회사의 창을 통해 밖에서 그녀를 데리러 온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에게도 사과와 축복을 마음속으로 보냈다. 곧, 그녀가 남편의 근처에 나타났고,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때… 그녀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머리가 점으로 보이는 거리였으니깐. 하지만, 잠시 돌아본 그녀의 모습을 나는 머리 속에 깊이 새겼다. 그것이… 내가 그녀를 본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는 마치 그녀는 없었던 사람처럼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종종,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찾으려고 하거나 수소문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마치 그녀와 나와의 암묵적인 룰인 것 같았다. 영원히 볼수는 없는 것을 알지만… 왠지 모르게 내 마음속에서는 그녀가 무사히 잘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연결된 것 처럼… 그것에 대해… 나의 그녀는 조금 탐탁치 않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기고 도망치다니, 참 그 사람답네요. 정말이지… 끝까지 짜증나는 여자에요.”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는 자신의 라이벌이 사라졌다는 것에 조금 아쉬운 기분을 느끼는 듯, 종종 서울을 향해서 인상을 찌푸리는 듯 보였다. 뭐… 생각해보면, 그녀가 도발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관계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니, 어떻게 보면 서로가 서로를 못마땅해하면서도 의외로 죽이 잘맞는 사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녀의 앞에서는 영원히 입밖에 낼 수 없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떠나고 나서, 나는 회사를 옮겼다. 추억이 남은 곳에 홀로 남겨지는 것도 가슴 아팠지만, 더 큰 이유는 더는 오피스 와이프 같은 것을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작지만 서울과 파주의 왕래가 조금 편한 중간 지점에 사무실이 있는 회사로 이직했다. 작은 회사여서 그런지 생활에 여유가 생긴 것은 조금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녀가 빠진 이후에도 나의 일상은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 나는 여전히 주말과 평일에 두 집을 오가며 지내고 있다.

아내는 세경이를 아쉬워하면서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홀로 서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몸이 좀 힘들고 돈은 많으니 육아 도우미 정도는 쓰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살짝 군기가 빠진 걸까나? 하지만 나에 대한 태도는 여전히 의존적이고 피학적인 성향인 것은 그대로다. 한마디로… 평범한 전업주부가 왠 SM 변태가 되버렸다. 아이고… 세경아… 이건 원상복구 시켜놓구 가야지. 어느 순간부터 나도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그런 부부 사이의 일과는 무관하게 대외적으로는 조금 훈훈한 일화가 된 모양이다.

아무래도 평일에 서울에 머물고, 일단은 이혼했다고는 전처이니 동행해서 나갈 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재결합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미담처럼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어이어이… 아들내미가 없다는 점에서 좀 수상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냐?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그녀는 어느 정도 내 아내로서의 위치와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조금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종종 농담 삼아 언제 재혼할꺼냐고 물어보면 울쌍을 짓는 모습도 귀여운 편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엄청난 미인인 건 사실이니…

나디아는 얼마 전에 해외 촬영도 다녀왔다. 패션 잡지에 모델로 주연급이 아니었음에도 사진빨과 미모가 워낙에 좋아서 원래 메인이었던 모델보다 왠지 컷이 더 좋아 보였다. 그리고… 여행에 동행했던 그녀의 딸도 엄마와 닮은 미모를 거기서 뽐냈다. 덕분에, 자투리 같은 같이 찍은 사진 한컷이 실려버렸다. 금발벽안의 모녀… 나름 애엄마라는 사실이 엄청나게 충격적이었을 텐데, 큰 여파는 없는 듯 했다. 안믿는 사람은 컨셉이라 생각하고, 믿는 사람은 되려 더 좋다는 분위기이니…

그녀와 나와의 관계는, 역시나 아내라는 느낌은 좀 그러려나? 왠지 아내보다는 자주 보지 못하는 애인 같은 느낌? 그 정도가 그녀와는 딱 적당한 것 같다. 그녀가 나에 대해 보내주는 애정은 남들 못지 않지만 그럼에도 왠지 그런 느낌이 마음에 편했다. 그리고 그러면서 조금은 안도했다. 이제 세상에 많이 익숙해진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할머니가 당부한 그녀에 대한 책임을… 내가 딱히 뭔가 하지는 않았지만 다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깐.

나의 사랑, 그녀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모델 일로 바빠진 나디아의 아이까지 세명의 아이를 돌보며 나도 챙기는 시골 여장부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전에 기억하는 그늘진 모습은 이제는 찾아 볼수가 없었다. 나름 내가 도와줄 수 없는 시골 생활이 힘겨울 법도 한데 그녀는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애정도 더 깊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면서 조금은 난감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왠지 모르게, 그녀의 애정 표현이 순종적이지 만은 않은, 오히려 도발적이고 적극적인 야생의 사냥꾼 같은 느낌으로 완전히 변모되어 버렸으니깐.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나는 그녀와 사랑을 나누면 항상 그녀의 사냥감이 되는 기분을 느낀다. 남자로서 조금 찌질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거대로 짜릿한 경험이다. 굳이, 바꾸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법적으로 그녀는 나의 처남댁이지만, 아마도 내 인생에 반려라는 위치에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서 오세요. 오늘 많이 더우셨죠? 오늘 메뉴는 시원한 콩국수에요.”

계절이 다시 돌아 여름이 돌아왔다. 다시 주말을 맞아 시골을 찾은 나에게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녀에게 나는 농담처럼 말했다.

“콩국수라… 좋네요. 설마… 이번에도 매운 맛은 아니겠죠?”

“에이, 전에 한번 농담한 거 가지고 또 그러신다. 그때도 사실은 순한 맛 드렸거든요? 얼른 씻고 오세요. 금방 내올께요.”

그래도… 고라니를 때려잡은 건 사실이지 않았던가? 뭐, 나는 문득 떠오른 예전 생각에 미소지으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문득 떠오른 과거의 회상 덕분일까? 다시 한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이제는 다시 볼수 없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녀… 그리고 그런 그녀가 남기고 가서 더 잊을 수 없던 마지막 인사… 가끔, 그걸 떠올리면 가슴 속에 아릿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잊어야겠지 라고 억지로 생각해본다. 

지금 어디선가 남편과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을 그녀… 그녀를 위해서라도 잊어주는 것이 현명하겠지? 나는 그래서 아릿한 기분이 조금 완화되는 것을 느끼며 그 날의 기억을 수면 아래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를 과장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잊으려 노력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그것을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극복해야겠지? 

밖으로 나와 보니 향긋한 콩국수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나는 허기를 느끼며 몸을 닦으며 생각했다. 그래,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떠올리고, 다시는 떠올리지 말자. 그리고… 아파하지 말자. 

‘사랑해요. 세명씨…’

나는 그녀의 마지막 인사를 기억의 틈 사이에 숨겨두면서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