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부
하지만, 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안하네. 나는 새벽녁에 동이 터오를 무렵에 그녀를 정원에서 안았다. 조금 전 자그마한 숲의 요정을 범하고 왔다면 이번에는 야생의 맹수랑 씨름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 강렬함과 교묘함이 싫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해가 떠오를 무렵에 다시 절정을 맞았다. 며칠 후… 나디아는 우리 집의 별채로 이사를 왔다. 아이들은 그저 동네 친구가 가까이 살게 되서 좋은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수줍고 어려워하며 처남댁을 보는 나디아와, 그런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동생으로 대하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조금은 밤의 시간이 바빠진 느낌이 들었다. 세경이랑 아내와는 달리 두 여자는 정확하게 공간은 구분하는 사람들이었다. 조금 생소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 공간에서 보내는 변화된 주말의 일상도 나는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너무 색다른 두 존재가 동시에 안긴다는 것이 좀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는 서울에서도 말은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망설이며 고한 이야기에 세경이의 평은 간단했다.
“호오… 몸종 대리전으로 가자는 건가?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네요.”
“몸종이라니… 나디아씨는 그런 느낌은 아닌데…”
“똑같아요. 어떤 의미로는 저와 도영씨의 종속 관계보다 그쪽이 더 위아래 구분은 명확한 사이 일껄요? 거기에 그림으로 그린 듯한 백마라니… 우리도 좀 분발해야겠네요. 마침 말이 나온 김에 잘됐네요. 잠시 거기서 바쁘신 사이에 저희도 준비한 것이 있으니 한번 보여드려야 겠네요. 뭐하니? 어서 보여드려.”
그녀는 아내에게 말했다. 그러자, 여전히 그 일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못하던 아내가 머뭇거리며 일어서서 내게 다가와 엎드렸다. 뒤를 보이면서… 그리고, 생각치도 못한 곳을 내밀었다. 여… 여긴… 나는 세경이에게 물었다.
“저기… 세경아. 설마 이거…”
“네, 맞아요. 후장이요. 드세요. 안계신 사이에 삽입 가능해지도록 상당히 넓혀놨어요. 뭐, 실전은 처음이니 어떨지는 넣어봐야 알겠지만…”
“야!!! 너 정말 임산부한테 뭐하는 짓이야!!! 당신도 지금 뭐하는거야! 왜 이걸 시키는 대로 다하고 앉아 있어!!!”
나는 성질을 내며 소리쳤다. 하지만… 세경이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임산부니깐 이제 위험해서 그런거라구요. 저희도 나름 힘들었어요. 몸에 무리하지 않게 넓히느라… 그래서, 안드실 꺼예요?”
아내는 왠지 노린듯이 가죽 밴드로 된 옷까지 입혀져 있었다. 그게 도드라진 배와 어울리니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결국 마다하지 못한 나도 참 빌어먹을 놈이라는 건 사실인 모양이다.
그렇게 서울에서도 어영부영 납득이 되어 버린 다음에 나는 신혼 여행을 떠났다. 뭐, 결혼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떤 의미에서 내 사람으로 들어온 여자와 같이 떠나는 여행… 신혼여행이라는 말이 틀리진 않는 것 같았다. 목적지는, 그녀의 고향 키르기즈스탄이었다. 그것은 내게 부탁한 할머니의 마지막 요청이기도 했다. 물론, 그녀와 함께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 떠나서 오랜만에 다시 방문한 고향의 풍경에 그리움보다는 생소함과 두려움을 더 느끼는 모양이었다.
현지에서 할머니가 알려준 교민 사업가의 도움으로 그녀의 가족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의 사촌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는 듯 했지만, 내가 남편이라고 말하자 상당히 실망한 눈치였다. 그리고, 그녀의 계부… 그러니깐 그녀의 어머니와 재혼한 사실상 그녀의 삼촌도 만날 수 있었다. 그를 만난 우리는 우리가 방문한 목적을 밝혔다. 그것은 나디아의 어머니의 유골의 양도였다. 우리의 설명을 들은 그녀의 계부는 군소리 없이 그 유골함을 나디아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을 끌어안은 나디아는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모두가 숙연해지는 분위기였다. 한바탕 눈물이 끝나고, 그녀의 계부는 그녀에게 사과했다. 모녀가 서로 떨어져 생이별하게 된 사실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처음에 예상하기로는 말이 안통하는 꼴통 무슬림들을 만나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나쁜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자신들의 가족이 관습 때문에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하였다. 나는 왠지 모르겠지만, 나디아의 엄마가 그렇게까지 불행하지는 않았고, 나름… 사랑받고 살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녀의 계부는 그런 나의 생각을 입증하듯 아내를 잃고 재혼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고 있었고, 나디아의 엄마의 방과 물건은 고스란히 남겨져 소중히 보관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디아는 겨우 마음 속에 한을 씻어내릴 수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가족들은 히우 그녀가 결혼했다는 사실과 내가 남편이라는 것을 수용하고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그저 멀리서라도 잘살라고 배웅해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유골은 도와준 교민에게 한국으로 보내는 절차를 부탁하고 현지에서 관광을 조금 다녔다.
나름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나디아와 정말로 부부처럼 신혼여행을 즐겼다. 오랜만에 밝아진 그녀의 모습이 내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나에게 안겨드는 그녀의 피부와 숨결도 최고였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여름 휴가를 거기에 다 써버리고 우리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할머니가 나에게 부탁한, 그녀의 모친의 유골을 돌려받는 것과 그녀를 행복하게 해달라는 약속을 지켰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녀는 몰라보게 변했다. 항상 주눅들어 있고 우울했던 인상은 간곳 없이 너무나도 밝게 우리 집에 가족으로 합류했다. 그리고 이곳의 생활에 적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의외로 그녀는 사는 것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과수원 할매… 그렇게 자기 없으면 남겨진 애를 어쩌냐고 징징거렸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 할매, 의외로 자기 며느리와 손녀에게 물려준 재산이 많았다.
남편이 그렇게 사업을 많이 말아먹었다고는 해도… 그녀의 앞으로 돌려진 과수원이며 밭이며 땅에 예금들이 적잖아 보였다. 이거야 원…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생계가 어려워 나한테 의지한 처남댁보다도 훨씬 부자잖아? 왠지 또 할매한테 낚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그녀는 할머니의 죽음 이후 낙담하지 않을까 했던 삶에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곳에 와서 좀더 세상에 더 나아가는 계기를 가졌다.
“이거… 정말 나디아야?”
“어때요? 잘찍었죠?”
처남댁은 의기양양하게 블로그에 올린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었고, 나디아는 그것에 대해 민망해서 고개를 못들었다. 전에 시골 생활을 하며 지루함을 블로그 활동을 한다는 것은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결혼하기 전에 사진을 좋아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런데, 잠시 잊고 있던 취미가 그녀의 합류로 인해 조금 불이 붙어버린 모양이었다. 처남댁은 나디아를 모델로 해서 시골의 풍경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이 정말로 수준급이었다.
그래서 블로그에 올린 그 사진들이 주변에 사람들에게 입에 오르내린 모양이었다. 확실히 내가 봐도… 대단히 아름다운 사진이었다. 본래의 미모를 잘 살리면서 풍경과 어우러진 모습이 청초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소녀의 순수와 엄마의 모성과 이방인의 선정적인 느낌이 배합된 그 사진들은 밤마다 내 품에 안기는 존재임을 알면서도 묘하게 불을 붙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그걸 잡아낸 그녀의 재능도 놀라웠고, 묘하게 포즈를 취하는 그녀의 재능도 놀라웠다.
그러다 결국 유명세를 조금 타버렸다. 나디아의 밭에서 나는 농작물들에 생산자 인증 사진으로 그걸 사용해버린 것이다. 왠지 구수한 시골 할매 할배들 사이에 유독 튀는 여신님의 모습은 상당히 주목을 받았다. 덕분에… 그녀는 그 이후로 조금 유명세를 타고 아마추어 모델 같은 제의들이 종종 들어오는 모양이다. 나디아는 그것에 대해 부끄러워 하며 거절을 하려고 하였지만, 처남댁은 왠지 그녀의 매니저라도 되는 듯 그녀를 부추겨서 그런 활동을 드러날 정도는 아니지만 소소하게 하게 되었다.
세간에서는 정체 불명의 시크릿 모델로 나름 사람들 사이에서 정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사진 중에서 한장… 나 외에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비밀스러운 사진을 보며 내가 아는 그녀의 정체에 대해 미소지었다. 그 사진에서는 왠지 모르게 레즈비언 같은 느낌으로 나신으로 안고 있는 처남댁과 나디아의 모습이 관능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의 부제가 미녀와 아름다운 야수라고 하면 처남댁이 화내려나? 나는 그걸 떠올리며 미소짓고 그것을 나만의 소중한 것으로 간직했다.
그렇게 그녀가 나에게 오고 다시 일상이 흘러갔다. 당분간 더는 소요가 없으리라 기대하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인생은 의외로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항상 파란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이번에는 그 조짐을 전한 것은 아내였다. 세경이와 같이 회사를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진지한 얼굴로…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전화가 왔었어. 오빠한테서…”
순간… 나는 무슨 소린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아내의 오빠? 그렇다면… 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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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중국 치고는 의외로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빌라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었다. 한인도 많고 치안도 좋아 보였다. 그래서 오는 와중에 큰 어려움 없이 도착할 수 있었고, 짐작가는 곳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래도,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금 각오가 필요했다. 나름,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려다 보니 긴장감이 들었다. 숨을 고르고 초인종을 누르자, 곧 누군가 집에서 나왔다.
“누구세요? 어…”
“안녕하세요? 저를 기억하시는 모양이네요. 처남 여기 있죠?”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숏컷에 조금 눈매가 가늘고 수수해보이지만 왠지 지적으로 보이는 조선족 여성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면서 망설였다. 아마도… 매뉴얼대로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해야 할 상대인지를 가늠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집안으로 안내되었다. 나름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더 좋아보이는 내부의 응접실로 안내된 나는 나온 차를 마셨다. 다기와 차도 고급이었다. 그걸 마시면서 나는 내가 여기에 온 과정에 대해서 잠시 회상했다.
아내가 자기 오빠에게 연락을 받았다는 사실에 나는 심히 당황하였다. 뭐라고 해도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 그 사람의 남편은 고인도 아니고 이혼한 것도 아니다. 나는 엄밀히 말하면 내 멋대로 남의 여자를 내 아내라고 여기면서 내 공간에 잡아두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도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기에 성립되고는 있지만, 이 관계는 처남이 돌아오면 설명하기 힘들어진다는 점에서 매우 취약했다. 그래서… 항상 불안했다. 그런데 결국 일부러 잊고 있던 존재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다행히도, 아내가 받은 자기 오빠의 연락은 무사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과 부모님 기일에 대해서는 좀 알아서 챙겨달라는 말이 전부였다고 한다. 남겨진 사람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묻거나 알아보려 하지 않고, 뭔가 말할 틈도 없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아내는 그 사실에 대해서 나와 세경이에게 있는 그대로 고했다. 세경이는 전화 번호를 보더니 잠시 생각하더니 인터넷으로 뭔가를 검색했고 뭔가를 찾은 듯 나에게 말했다.
“발신처가 쉔젠이네요. 중국에 있다는 건 사실인 모양이네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응? 네가 나한테 물어보는거야?”
나는 조금 당황했다. 항상 내 문란한 제 2의 인생에 멘토가 되어주셨던 나의 조언자께서 갑자기 나한테 묻다니… 그런 나의 당황함에 세경이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이번 건에 대해서는 저 개입 못해요. 이건 제가 꾸민 일이 아니고 정말로 저쪽에서 발생된 일이에요. 거기서 제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개입하는 건 신사협정에 위반이죠. 뭘해도 좋은 소리를 듣기는 어려우리라고 생각해요. 결국 이건, 부부의 일이고 그 일에 대해서 키를 쥐고 있는 건 그 사람, 그리고 과장님이 겨우 개입할 여지 정도가 있겠죠. 저는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에요.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이번 일에 대해서 과장님과 저쪽이 바라는 지향점과 대척점에 서있어요.
저는 글러먹은 년이지만, 그래도 만약 제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저는 남편 버리지 못하리라 생각해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저쪽은 이미 마음 정리가 다 되었다고 보이는데요? 결국, 저와는 미묘하게 정반대의 선상에 선 사람이에요. 그러니… 제가 무슨 소리를 해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의지로 자기가 결정하는 수 밖에요. 그리고… 거기서 과장님이 역할을 하셔야 할꺼라고 보여요. 이것만 확실하게 전해주세요. 저랑은 무관한 일이고 저는 이런 비겁한 방식으로 도발하지는 않는다고요.”
세경이의 말은 그게 끝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아내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며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다. 배가 만삭이 된 아내는 늦더위에 땀을 많이 흘렸다. 어쩌면 집에서 알몸으로 있으라고 한 것은 그런 것도 배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저쪽에 대해서는 가차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항상 나에게 유용한 조언자였던 그녀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좀 난감함을 느끼면서 다음의 일에 대해서 고민했다.
시골로 돌아와서 그 얘기를 바로 하지는 못했다. 나는 나를 맞아주는 처남댁과 나디아와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처남댁이라는 단어의 울림에 대해 속이 쓰렸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이 사람이다. 언제까지… 처남댁이라는 이름으로 곁에 두는 건 도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빠르든 느리던 해결해야 할 일이다. 그러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그런데 왠지, 그런 마음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토요일 밤이 되자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정원의 데크에 나와 맥주 한잔을 하며 더위를 식히며 앉아 있었다. 물론, 머리 속에는 복잡한 생각이 가득차서. 그런데 그때 집에서 나와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처남댁이었다. 그녀는 쟁반에 뭔가를 들고 나와 내 앞에 앉았고,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지금은… 아이들 재울 시간 아닌가요?”
“오늘은 나디아 동생 차례에요. 아이들도 다같이 몰려자는 것을 더 좋아해서 요즘은 그렇게 순번을 정해서 하고 있어요. 저는… 당신과 잠시 시간을 보내려고 나왔구요. 평소대로 맥주시네요. 그걸로 만족하시겠어요?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봄에 담근 술이 제법 잘 익은 것 같아요. 한잔 드릴께요.”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포도주 빛깔이 나는 술을 잔에 따랐다. 술은 달달하고 향긋한 냄새를 풍겼고, 한잔을 넘기자 속에 불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어우… 이거 뭐야? 도수가 왜 이렇게 높아? 거기다 도수가 문제가 아니라 성분도 좀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불이 올라오는 것이 위장만이 아니었으니… 내가 당황하는 사이 그녀도 가져온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한잔을 마셨다. 나와는 달리 태연하게… 어지간한 도수가 아닌데 미동도 없었다. 정말로 이 처자… 알고보니 술도 쎈거였던가? 새삼 새로운걸 알게 되네. 하지만 놀란 건 술이 아니라 이어진 그녀의 말이었다.
“오늘… 표정을 보니 뭔가 제게 할말이 있으시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마도 그건 제 전남편에 대한 이야기인가 보죠?”
술이 확 깬다. 하지만 동요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애써 차분하게 그녀에게 대답했다.
“전남편이라뇨. 처남 안죽었잖아요. 남편이죠.”
“남편은 당신이고요. 저에게는 이미 그는 전남편이에요.”
단호한 입장이었다. 역시 여자들은 이런 점이 무섭다. 하지만… 나는 조금 그녀를 리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조금 매정하게 받아쳤다.
“그렇게 짐작을 바로 한걸 보면… 아마도 연락을 주고 받으신 모양이죠? 저 몰래…”
“세경씨가 그렇게 추리하던가요? 아니지… 그쪽은 이번 일에는 개입하지 않으려 하겠군요. 당신 생각인 모양이네요. 미안하지만 연락을 주고 받지는 않았아요. 저한테는 아무런 연락을 해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에게 몰래 숨긴 것이 있는 건 맞아요. 그건…”
“처남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인가요?”
나의 말에 그녀는 미소지었다. 정답인 모양이다. 그녀가 대답했다.
“알고 계셨네요.”
“뭐… 짐작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래야 시나리오가 맞아 떨어지더군요.”
“무슨 시나리오요?”
“그건… 처남은 회사 돈을 들고 튄 동업자를 잡으러 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본인이 회사를 고의로 파산내고 투자금과 거래 대금을 챙겨서 대금 회수해온다는 핑계로 해외로 도망쳤다는 시나리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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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그것도 사실인 모양이다. 그녀는 말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역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 비정한 이야기지만, 이런 경우에 대표가회사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몰락했다는 비극은 별로 없다. 회사가 휘청거린다는 사실은 본인들이 제일 잘아는 데 그런 가라앉는 배에서 머물 바보는 흔치 않은 법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배임과 횡령을 저지르고 튀는 것이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기 마련이다. 처남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겠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생각해보니 그것도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네요. 거듭… 당신을 속였던 것에 대해서는 저도 변명의 여지가 없군요. 하지만… 말할 수 없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에게는…”
“왜죠? 제가 의지가 되었던 거 아닌가요?”
“그럴리가요. 그런 것이 아니라… 여자로서의 자존심의 문제였어요. 제가, 그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당신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왠지 처연해보이는 그녀의 말에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버림을 받다뇨? 그건 좀 과한 해석이 아닌가요? 처남의 입장에서는 아마 정신이 없어서 챙기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에게는 여자가 있어요. 저 대신에 같이 동행한…”
입이 다물어 졌다. 아아… 얘기가 이제서야 술술 풀려가네.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회사에서 그 이의 비서 같은 일을 보던 조선족 유학생이었어요. 중국 비즈니스에 통역을 겸해서 채용했는데, 그 사람의 비서로 붙여둔 다음에 사실상 내연 관계로 발전한 모양이더라구요. 사실,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어요. 회사가 망하기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부터요. 하지만… 입밖에 꺼낼 수는 없었죠. 제가 아는 그라면 틀림없이 잡아뗄 것이 뻔하고, 그러면 남편 밖에서 큰일 하는데 질투나 하는 며느리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으니깐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죠.
제가 이미 그 시점에서 그의 마음에 있지 않고 대신 다른 사람이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걸 돌려보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어요. 언젠가 기억하시는 여름 휴가를 같이 보낸 가족 여행도 그걸 위한 일환이었죠. 하지만… 의미는 없더군요. 그는 항상 제 앞에서는 매너 좋고 저밖에 없다고 말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회사에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여자를 안은 모양이더군요. 어느날 회사에 들려서 그의 사무실에 발견된 여자 속옷… 말 다했죠.
그 무렵에 제 마음속에 그에 대한 마음도 식어버렸어요. 더는, 뭘해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회사가 망하고 그가 제 앞에서 금방 돌아온다고 말하고 사라질 때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어요. 그는 이제 제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냥, 절망하는 것이 제게 남겨진 전부였고, 저는 그걸 그냥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어요. 슬슬 빚쟁이들이 남편의 행방을 찾아 차압딱지가 붙은 집에 몰려오자 저는 그냥 체념해 버렸어요. 그들의 손에 끌려가 어딘가에 팔려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날 저를 구해주셨던, 당신이 제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그날 저는 이미 당신에게 빠져버렸어요.하지만, 그래서 그걸 당신에게 말할 수는 없었어요. 당신에게 제가…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여자고, 그래서 당신의 주워졌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어요. 당신은 저에게 거래라는 형식으로 정중하게 대했지만, 그래도 저에게는 그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으니깐요. 물론, 이곳에 살 공간을 마련해준 이후부터는 그런 마음을 조금씩 안도하며 접어갔죠.
그리고 저도 바보가 아니니 이런 곳에서 제가 있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뭔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요. 당신에게, 그 사실들에 대해서 모르는 척 숨긴 건 정말로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용서해주시길 바래요. 저에게는 당신이 저에 대해 가지는 마음에 대한 확신이 들기 전까지 그걸 드러낼 수는 없었어요. 제게 당신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해해주시길 바래요.”
기가 막힌 생각이 들었다. 휴양지에서 봤던 그날의 강렬한 기억… 그리고 이 여자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방에게 이렇게 큰 여파가 되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녀도 나에게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조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와… 이거, 그날의 고백보다도 강한데요. 하지만 미안해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우리가 그런 사이가 되지 않았어도 남편 이야기를 대놓고 떠들고 있는 걸 어떻게 했겠어요? 용서를 빌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마음 속에 담아두고 고민하고 있었다면, 미리 알아주지 못해 내가 미안해요. 그리고… 솔직히 좀 찔리는데요. 내가 솔직히 말해 처남에 비해 나을 것이 뭐 있나요? 나도 여자 관계로 그리 떳떳하지 못한 건… 아니 어쩌면 더 심한 놈일지도 모르는데…”
솔직히 내가 더 악랄한 놈이 사실이지. 지금 여자가 몇 명이야? 이혼 하고 나서 인생에 여복이 딸려오나? 하지만 그런 자조에 대해서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뇨, 전혀 달라요. 내가 문제 삼는 건 누군가를 좋아했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죠. 솔직히 말해… 바람 피운거 짜증나죠. 나만의 사람이 아니라는 거 화가 나요. 하지만, 더 화가 나는 건 그걸 거짓말로 숨기려고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간단히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솔직히 말해주는 사람과 거짓말로 속이려는 사람… 전자는 화가 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이 자극받을 수도 있지만, 후자에게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 사람의 신뢰 자체가 사라지니깐요.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어요. 다른 여자에 대해서 숨기지 않고 나에게 당당하게 밝혔고, 그렇기에 저 역시도 당신에게 짜증은 났지만 오히려 믿음은 더 견고해졌어요. 적어도, 마음을 숨기고 사람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비겁하게 사람 마음 책임감없이 가지고 놀지 않고, 그러면서도 다시 돌아올꺼라는 거짓을 말하고 떠나지는 않을 꺼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당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제 신경을 곤두세우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걸 용인하고서라도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한거예요.
조금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저지른 여자 마음 홀리는 추파들에 대해서 자각을 하기를 바래요. 인성 좋은 바람둥이 서방님.”
으엑… 나디아의 인용이다. 끝이 조금 뜨끔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녀의 마음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 상당히 과분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이거야 원… 나는 정말로 나 꼴리는 대로 저지르고 다닌건데. 저렇게 말해주니 죄의식이 만땅이네. 일단은 감격스러운 마음은 뒤로 하고 나는 그녀를 보면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논하기로 했다.
“좋아요. 일단은 나에 대한 마음… 진심이라는 걸 고백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감당하기 힘든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이해해준 것도 고맙고… 지금부터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논의해보기로 하죠.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까지는 무시하고 살아왔지만, 우리와 무관한 용건이라도 기척을 느낀 상황에서 방치하고 모른 척 할 수는 없죠. 어떻게든… 마무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네, 그렇죠. 마무리를 지어야죠. 말씀드린 대로 그 사람이 있을 곳은 짐작되는 곳이 몇군데가 있어요. 아마도, 애인과 같이 사라졌으니 그 아이와 유관한 장소에 있으리라 생각돼요. 몇군데… 장소를 좁혀서 찾자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찾아가서 마무리 하도록 하죠. 제가 해결할께요. 당신에게 그것을 해달라고 하면… 제가 여기 서있을 자격이 없는 거겠죠. 제가 해결할께요. 가서, 서로의 입장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오도록 할께요.”
그녀의 말에서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이미… 전남편이라고 칭한 시점에서 정리는 마친 건가? 그녀에게서는 자신에게서 처남의 자취를 지우겠다는 의지만이 강력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서 조금 망설여졌다.
“저는… 그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러면… 지금처럼 고모부와 처남댁의 사이로 지내자는 건가요? 이제, 이혼했던 아가씨도 사별하고 돌아왔으니, 각자 자기 사람한테 돌아가자고 하시는 건가요?”
이제는 왠지 살기까지 느껴지는 기분이다. 나는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진정해요. 그럴 일이 없다는 거… 당신이 가장 잘 알잖아요. 어쩌다 보니 주변에 여자들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제가 사랑하고 제 아내로 여기는 사람은 당신이 유일해요. 그건 절대로 변치 않을 진심이에요. 전에 말했듯이… 당신은 내 여자에요. 그러니 다른 놈에게 넘겨줄 일은 없을꺼예요.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서 당신이 나서는 건 좀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남편이었잖아요. 그리고, 당신은 처남이 당신을 버렸다고 하지만, 처남의 입장에서는 버렸다기 보다는 미련을 못끊었다는 편이 맞다고 생각해요.
우선 순위는 낮췄지만 그렇다고 연민까지 사라진 건 아닌 상대… 그 조강지처에게 자신은 더는 당신과 살수 없고 이미 다른 남자가 생겼으니 정리하자는 말은 처남은 물론…. 당신에게도 모욕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니, 당신이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결국, 이건 제가 해결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 들어요. 내가 해결할께요. 처남을 찾아가서, 일을 마무리 짓고 오도록 하죠. 그것이 제가 당신의 남편으로 해야 할 의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나의 말에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떠올렸다. 감격, 의혹, 걱정 등의 색깔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나에게 말했다.
“결국은… 당신은 그 사람에게도 가능하면 상처주지 않고 일을 해결하려는 생각이군요. 정말이지… 못말리겠네요. 대체 어디까지 사람이 좋아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요? 앞으로 당신 인생에 연이 닿고 그런 식으로 홀릴 여자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가늠조차 안가는 제 생각도 좀 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아니… 그건, 너무 앞서가는… 제가 무슨 대놓고 여자들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지골로도 아니고…”
“농담이에요. 그걸 가지고 지적하면 그런 오지랖에 거둬진 저 자신에 대해서도 할말이 없게 되는 거겠죠. 알았어요. 그렇게 하세요. 당신의 아내로서 남편의 말에 따를께요. 하지만… 한가지만은 저에게 약속해 주세요.”
“뭘요?”
“반드시… 저에게 돌아오신다는 약속이요. 그걸 하지 않으시면 보내드리지 않을꺼예요.”
그녀의 말에서는 절박함이 담겨져 있었다. 그냥 돌아오는 게 아니고 저에게 돌아온다라… 그냥 단순한 의미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겠지? 은근히 다른 여자들 보다 우선이라는 의사를 내 입으로 말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절박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물론이죠. 내가 돌아올 곳은 여기 뿐인걸요.”
“아아… 역시 바람둥이. 서울에서 닷새나 머물면서 오면서 말은 잘하세요. 하지만… 그걸로 충분해요. 당신을 믿어요. 여기서 당신을 기다릴께요. 그리고… 한가지 더 부탁할께요.”
“뭐죠?””
나의 말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곁에 놓인 술병을 들고 들이켰다. 무슨 영화속의 장면 처럼 검붉은 액체가 입가에 튀면서도 콸콸 쏟아져 그녀의 입에 술이 들어갔고, 그녀는 술병을 한병 원샷했다. 그 독한 술을 완샷하고서도 큰 미동이 없던 그녀는 입을 손으로 훔치고 병을 내려놓더니… 옷을 벗었다. 왠지 모르게 이곳에 와서 야외 노출에 대해서 대담해진 그녀였다. 그녀는 이제는 별로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이 얇은 홈드레스와 속옷을 벗고 보기좋은 글래머러스한 알몸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말했다.
“안아주세요. 아내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