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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네? 아… 그…”

“불편하지 않으셨나요? 그렇다면 수용하실 생각이신가요?”

나는 얼굴에 당황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저는 감히 짐작을 못하겠네요. 도리어 나디아씨가 불편한 이야기가 될 듯 해서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도와드린 일에 대해서 너무 과하게 저를 높게 평가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과한 이야기를 하시다니…”

그때 그녀가 말했다.

“어머니가 하시는 당신에 대한 평이라… 간단해요. 인성 좋은 바람둥이.”

“켁!!! 그 할매 정말… 저에 대해서 정말로 그렇게 말하셨어요?”

“네. 그리고 그건… 돌아가신 시아버님에 대해서 어머님이 하시는 평가와도 동일해요. 시아버님도 비슷하셨거든요. 담담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여자들 많이 몰리는 인기인이셨죠. 그리고 그러면서도 여자들 단 한명도 울리지 않은 분이시고요. 그래서 외교 업무에서도 승승장구하셨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시아버지에 대해서 어머님은 투덜거리면서도 항상 잊지 못하시나 봐요. 그리고… 그래서 그분을 조금 닮은 당신을 좋게 보시고 저와 엮으시려고 하시는 모양이더군요.”

“나디아씨는… 의외로 담담해 보이시네요. 본인의 일에 대해서 본인을 제외하고 논의되고 있는 일이라 상당히 불쾌하리라 생각했는데요…”

나의 말에 그녀는 나를 흘깃 보다가, 다시 차창으로 시야를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모르겠어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운명이 결정되는 일은 너무 자주 만나서 이제는 익숙하다는 생각마저 드니깐… 그에 대한 거부감은 별로 없어요. 사실 따지고 보면… 제가 어머님을 의지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뭔가 결정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죠. 그분마저 저를 떠나면… 저는 정말로 막막해져서 망망대해에 놓인 표류자처럼 되버릴테니깐요. 그래서… 그런 의사를 표하시는 것에 대해서 타당한 이야기라는 것에는 인정해요.

그렇다면 그것이 저 개인의 입장에서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는 선택에 크게 영향을 주진 않겠죠. 그러니, 이 상황에서 제 마음을 고려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논의에 대해서 불쾌해 하니 마니 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요. 결국은 당신의 선택에 따라서 이 제안은 결정이 될꺼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쭙고 싶네요. 일단은 오늘은 결정하지 못하신 모양인데… 다음번에 다시 진지하게 제안이 들어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실꺼죠? 저는 거두실 건가요?”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거두느니 마느니 하는 표현부터 말이 안되는데요.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여자를 남자가 거둔다는 말이 어딨습니까?”

“훗… 조선시대는 아니지만, 완전히 인종이 다르면서 돌아갈 고국도 없는 여자에게는 딱히 틀리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이곳에서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기가 너무 힘드니깐요. 지금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모호한 남녀 평등을 가지고 논하지는 마세요. 저는 그런 것이 당연히 무시되는 나라에서 도망쳐 온 여자라서 그런 이상적인 이야기 별로 안믿어요.”

“그렇다면 정확하게 말씀드리죠. 거절입니다.”

“왜죠?”

나의 말에 그녀는 시선을 나를 다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 욕심쟁이라서요…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않으면서 먼저 사랑하지는 않기로 했거든요. 그러니, 자신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상황이 적당하니 마음대로 하라는 제안에 대해서… 별로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아, 그런가요. 과연… 인성 좋은 바람둥이… 역시 대단하시네요. 결국은… 제 마음을 먼저 드러내고 자기에게 오라는 말이신거죠?”

“그런 의미는…”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그런데 그녀가 생각치도 못했던 말을 꺼냈다.

“예전에 당신을 숲속에서 봤어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차를 주차하시는 곳이 제가 밤산책을 하고 오는 길이죠. 거기서… 지인 언니를 안으시는 모습을 봤어요.”

역시… 그날 거기 누가 있었구나. 그리고 그게 이 처자였던 거야? 나는 민망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걸 보면서, 문득 생각이 났어요. 언제부터 제가 그 공터를 밤산책을 하게 되었는지… 당신이 그곳에 차를 주차하기 시작하면서 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그 순간… 멍하니 보던 장면에 가슴이 아릿해지는 것이 있었죠. 그래서… 황급히 돌아왔어요.”

“네? 저기… 나디아씨…”

나는 생각치도 못한 그녀의 말에 할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남의 일처럼 얘기했다.

“죄송하지만 저도 답은 몰라요. 정말로 남자들이 흔히들 하는 로맨스 판타지처럼 한눈에 반한건지… 아니면 사람 구경도 하기 힘든 이곳에서 보게 된 남자 냄새에 끌린건지… 하지만, 제가 설명하기 힘든 이유로 당신에 대해서 시선이 갔다는 건 솔직히 고백할께요. 하지만… 그 동안에는 드러낼 수 없었어요. 이미 당신에게는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은 저에게도 좋은 언니니깐요. 그게… 제가 당신에 대해서 가지는 감정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전부에요.”

그리고 마침, 그 순간 차가 도착했다. 내가 항상 차를 대던 공터… 전에 그녀가 우리의 정사를 목격한 그곳에… 그녀도 그곳을 보더니 조금 후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나를 보며 말을 마무리했다.

“일단은… 오늘 했던 이야기는 미뤄두도록 하죠. 어머님과도 그렇게 마무리 하셨을 테니… 저도 당분간은 어머님을 간호하느라 바쁘고, 지인 언니에게 볼낯이 없는 일상의 변화에 도전할 여유가 없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니깐… 얘기는 나중에 인연이 되면 다시 하도록 하죠. 그리고 오늘은 한가지만 더… 죄송한데 좀 도와주시겠어요?”

“네? 뭘요?”

“이곳에 오니 저도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네요.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조금… 많이 굶주렸어요. 외도라고 하면 무슨 의미가 될 것 같으니…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저를 안아주셨으면 해요.”

“네에? 아니… 저… 저기…”

“걱정하지 마세요. 들러붙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순수하게 사람의 몸이 그리워서 그러는 거니깐요. 불편하시다면 하고 돈 주세요. 마음을 담지 않고 그냥 러시아 창녀 하나 샀다고 생각하시고 돈주고 안으세요. 그것도 안되세요?”

“그런 말이 어딨습니까? 러시아 창녀라니…”

나의 말에 그녀는 조소하며 말했다.

“한때… 어머님한테 조금 반항하던 시기에는 그렇게 밖으로 나돈 적도 있어요. 남자들이 줄을 서던데요? 뭐… 그런 건 염두에 두지 마시고 어떠세요? 부탁… 들어주시지 않으실 껀가요?”

사실… 거절하기 무지하게 어려운 제안이었다. 게임 속에 엘프 소녀 같은 처자가 자신을 사서 안아달라는데 그걸 거절해야 하다니… 머리 속에 수만가지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내린 결론은… 역시나 조금 찌질했다. 잠시 후 나는 서울로 가는 차에 엑셀을 밟았다. 그러면서 사이드 미러로 보이는 내가 떠나는 동안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이 머리 속에 떠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역시나 키스가 고작이었다.

짧은 입맞춤 후에 정중한 퇴거 요청… 그녀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예의를 가지고 대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는… 시골 집에 들리지도 않고 그대로 서울로 향했다. 지금의 표정을 처남댁에게 들킬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깐… 가면서 계속 생각했다. 왠지 모르게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그녀… 가혹한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온 그녀에 대한 책임이 뜬금없이 나에게 넘어왔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대체 나에 대해서 다들 뭐가 그렇게 좋은 게 있다고 그러는 걸까? 세경이의 말처럼 다들 취약 계층에 있어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한 사람들이라는 건 공감하지만… 고작 그 정도를 가지고 그렇게 과한 호의를 받아도 되는 걸까? 그리고… 내 자신의 마음도 감이 안잡혔다. 지금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처남댁을 사랑한다. 그녀를 나의 아내라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세경이의 존재에 대해서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도 있었다. 그녀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고 오늘 또 다른 여인에 대해서 마음이 스며든다. 그녀가 보여준 절망 속에 힘없는 미소가 왠지 모르게 눈에 계속 밟혔다. 내가 이렇게 지조없는 놈인줄은 몰랐네… 어쩌면, 이래서 아내가 나를 버리고 도망간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말하기 어려운 마음 속에 생각은 잠시 수면에 가라앉히고 다시 일상은 시작되었다. 세경이는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지만 딱히 말하진 않았고, 여전히 주말에 시골에 가면 처남댁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종종… 나디아와 그녀의 시어머니도 놀러온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변화되지 않은 일상에 만족하며 변치 않기를 바랬다. 하지만… 의외로 삶은 변화 무쌍한 것인 모양이다. 생각치도 못했다. 연락이 올 줄은… 그건 퇴근을 하고 나서 세경이와 한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른한 여운을 즐기던 시간이었다.

“응? 이게 뭐야… 모르는 번호네.”

“그럼 무시해요. 스팸인가 보네요.”

“아냐. 근데… 이상하다? 왠지 번호가 익숙한 기분이 드네. 뭐지? 전화번호부에 저장이 안된 이 번호는? 잠깐만…”

나는 만류하는 세경이를 뒤로 하고 왠지 모르게 익숙한 발신 번호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어?”

그때 나의 반응에 세경이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왜요? 누군데 그래요?”

나는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말했다. 하지만… 말하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설마 먼저 전화를 해올줄이야…

“아내야. 이혼한 전처가… 전화왔어. 잠시 만날 수 있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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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카페에서 아내를 기다리면서 예전에 시간에 대해서 떠올려 봤다. 그리 길지 않았지만 같이 한 집에서 살았던 여자… 그리고 나름 무덤덤한 느낌이 강했지만 사랑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 대해서 의외로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것도 나름 놀랍네. 허영이 많고 성격이 별로 안좋았지만, 그래도 우리 아이 엄마고 결혼 생활 동안 큰 문제없이 지냈었는데, 이렇게 생각나는 것이 없다니… 외도를 하긴 했어도 나도 했으니 할말은 없고, 나름 미인이었는데 이렇게 인상이 희미한 줄은 몰랐다.
 
최근에 너무 인상이 강한 여자들을 많이 만나서 그런가? 모략가 세경이나 순진해 보여도 은근히 야성적인 처남댁이나 묘하게 서정적이고 부서질 것 같은 나디아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예전 추억을 떠올릴 여지를 안주네. 나도 참… 글러먹었구만. 이혼할 때만 해도 어떻게 사나 생각했던 것이 얼마 전인데… 이젠 왠 카사노바? 그러면서 한편으로 의문이 떠올랐다. 갑자기 왜 보자고 했을까? 재혼하고 나서는 처가집과도 발걸음을 끊었다고 들었는데… 하필 전남편인 나를 왜?
 
전화번호까지 지워버리고 잊어버려서 순간 누군가 당황했을 만큼 머리 속에 지워두었던 그녀의 만남 요청에 나는 무슨 용건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설마하니… 재혼한 남편이랑도 불화가 있어서 나한테 다시 돌아오겠다느니 하는 건 아니겠지? 왠지 고소한 망상이지만 그럴리는 없으리라 여겼다. 아무래도… 태현이를 보고 싶은 모양이려니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가 나타났다. 
 
“오랜만이네. 그 동안 잘 지냈어?”
 
“어… 어어?”
 
그녀는 왠지 지난주에 보고 다시 보는 것처럼 나를 보고 인사했다. 하지만… 나는 당황해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당황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일단… 미모. 아, 그래… 생각해보니 전처… 대단히 미인이었지. 예전에는 남들이 그러는 말에 무심하게 그러려니 했다. 근데… 지금 보니 왠지 모르게 말로만 듣던 미모가 제대로 보이는 느낌이다. 내 마누라… 이 정도로 미인이었나? 나디아에게 꿇리지 않을 정도의 미모인줄은 몰랐네. 나는… 어쩌면 아내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살았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두번째 당황한 이유는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늦여름이라 아직 더운 시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건 틀림없는 상복이다. 누가… 죽은 건가? 설마… 남편? 그러고 보니 그녀의 얼굴에서 조금 그림자 같은 것이 보였다. 그것으로 나는 왠지 모르게 내가 생각했던 것이 맞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가장 당황하게 했던 것은 그녀의 몸 상태였다. 그녀의 몸은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당황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 임신했어?”
 
그녀가 나의 질문에 조금 처연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껏 배가 부푼 전처의 모습을 보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하… 해야 하나? 잠시간의 침묵이 오가고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다행스럽게도… 첫 질문은 아들에 대한 것이었다.
 
“태현이는 잘 지내고 있어?”
 
“뭐… 그렇지. 요새는 시골에 가서 지내고 있어. 그렇게 지겹던 아토피도 다 나았어. 이제는 까매져서 완전 시골 아이 다됐지.”
 
“다행이네. 엄마 없이도 그렇게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서…”
 
“당신은 좀 어떻게 지내. 왠지… 할말이 많을 것 같아 보이네.”
 
나의 말에 그녀는 조금 자조하듯이 웃으며 말했다.
 
“욕해도 돼. 당신 버리고 튄 여자가 잘되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지.”
 
그리고 그녀는 그 동안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재혼 생활에 대해서는 생각만큼 큰 소요는 없었던 모양이다. 내심 나 버리고 가서 못된 새신랑한테 괴롭힘 당해봐라! 라고 저주한 적도 있는데 상대 남자가 그런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름 나이도 있고, 이미 이혼하고 나서 아내와 재혼한 사람인지라 그렇게 젊은 부부들처럼 철없이 굴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나름 자수성가한 사업가이기도 해서 사는 건 대단히 호사스러웠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아내도 나름 나와 살 때 이상으로 충실히 그 사람의 아내로 임했다는 모양이다.
 
내 앞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야기를 하면서 희미하게 미소짓는 것이 보였으니깐. 그걸 보니 실감이 났다. 아… 이제 눈앞에 이 여자… 정말로 내 여자 아니구나. 그 남자 여자구나 라는 생각이. 그런데 이야기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 예상대로 남편이 죽었다고 한다. 음주 후에 주관하던 공사 현장에서 실족한 모양이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보고 CCTV에서도 혼자 기분 좋아서 난간을 걷다 떨어지는 것이 나온 빼도 박도 못한 사고였다고 한다. 그래서… 덕분에 전처는 과부가 되버렸다. 그것도 하필이면 홀몸도 아닌 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상황에서…
 
“유감이네… 삼가 고인에게 조의를 표합니다. 근데… 갑자기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뭐야? 설마 부고를 전하러 온 건 아닐테고…”
 
나의 의문에 그녀는 조금 진지하게… 나를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결론만 말할께… 여보, 나 좀 도와줘.”
 
“뭘? 이 시점에서 뭘 도와달라고?”
 
“남자가 필요해.”
 
아마도 내 눈빛이 급속도로 차가워지는 것을 본 모양이다.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상한 의미로 듣지 마. 그런 뜻이 아니라… 날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야. 나, 지금 협박 당하고 있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협박? 무슨 협박? 무슨 원한 살 일이라도 저지른거야?”
 
나의 질문에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남편이 남긴 유산이 좀 있어. 알다시피… 상속자는 나와 내 뱃속에 아이지. 근데, 그게 적은 돈이 아니야. 그래서… 그걸 두고선 남편의 죽음을 계기로 한 몫 챙기려는 사람들이 나를 두고 협박하고 있어. 남편의 전처와 시동생, 그리고 계모가 하루가 멀다하고 나를 찾아와서 내가 상속할 남편 재산들에 대해서 일정 부분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협박하고 있어. 동의하지 않으면 무슨 험한 꼴을 볼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말이야. 지금… 너무 무서워 죽겠어.
 
당장이라도 그 사람들이 나와 아이를 어떻게 해꼬지 할지 몰라 잠을 이룰수가 없어. 남편 죽은 장례 치르고선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드니 나도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어. 참고 참다 결국 폭발해서… 방법을 찾았는데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없더라. 생각나는 사람이라고는 겨우 당신 밖에 없었어. 알아. 내가 당신에게 빌어먹을 몹쓸 년이었다는 건 내가 더 잘 알아. 하지만… 지금은 당신 외에는 내가 부탁할 사람이 없어.”
 
“그럼 그 재산… 그냥 포기하는 건 어때? 적당히 넘겨주면 그쪽도 조용해질텐데… 위협에 시달려서 뻥차버린 전남편 찾아오는 건 말나오지 않겠어? 차라리 아이랑 맘편히 살고 싶다면 그게 나을텐데?”
 
나의 말에 그녀는 분개하며 소리쳤다.
 
“그럴수는 없어! 내가 어떻게 손에 넣은 건데… 그리고 그건 엄연히 나와 이 아이의 것이야. 일생동안 남편 발목만 잡고 돈이나 뜯어내던 그 인간들에게 넘겨주느니 차라리 불태워 버리고 말지. 그리고… 넘겨줘서 해결될 일도 아니야. 전처랑 계모는 그러면 물러날지 몰라도… 시동생은 안물러날꺼야. 그 자식은 그걸 통째로 가지고 싶어하는 것 같아. 자꾸… 나한테 협박을 겸해서 추파를 보내고 있다고. 남자가 그립지 않냐는 둥. 아이는 같은 집안에서 키워야 한다는 둥… 나를 어떻게 해서 전부 자기 손에 넣을 생각인 것 같아.”
 
키르키즈스탄이나 대한민국이나… 근데 무리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아내의 미모라면 탐이 나지 않는 것이 거짓말이겠지. 거기다 잘나갔던 형의 아내… 먹어보고 싶다는 것이 모든 못난 동생들의 욕망이겠지. 아내의 말에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해는 갔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아내가 다급하게 말했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용서가 안되는 거… 잘 알아. 내가 해놓은 짓을 생각해보면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망언이겠지.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가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친정 식구들도 다들 뿔뿔히 흩어져서 아무도 연락이 안된다고. 제발 부탁해… 나를 좀 도와줘. 아니, 그냥 맨입으로 도와달라고 안할께. 거래를 하자. 나를 괴롭히는 그 치떨리는 인간들… 내 곁에서 사라질 때까지 도와주면 그 대가로 내가 받을 유산에서 섭섭치 않게 챙겨줄께. 그러니깐… 제발 좀 나를 도와줘. 이건 당신에게도 손해보는 일이 절대 아니야. 생각해보라고. 좀 짜증나지만 예전에 같이 살던 마누라한테 남편 행세하고선 한 몫 크게 챙기는 거라고.”
 
그녀의 말에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아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감정이 들어가진 않았다. 그녀는 내가 자기에게 심하게 화가 났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아들을 너무 챙기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 정도가 다일까? 그보다는… 나는 묘하게 주시되는 것이 있었다. 예전에 같이 살았으면서도 왠지 자각하지 못했던 아내의 미모… 그리고, 그녀의 도드라진 배… 상복을 입은 임산부의 모습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뭐지?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다. 예전에 아내와 같이 살던 시절에도 이 정도로 아내에게 깊은 관심이 생긴 적은 없었는데… 지금 그녀가 나를 떠나고 다시 눈앞에 나타난 상황에서 묘하게 사람을 자극하는 것이 있다. 이 감정…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나에게 매달리는 그녀에게,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연락을 주겠다고 말한 다음에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역시… 거절하는 것이 맞겠지?”
 
세경이는 내 질문에 조금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나도 참 찌질하구만. 전처의 구원 요청에 대해서 의논할 사람이 불륜 중인 오피스 와이프라니… 물어볼 상대로서 최악이지만 달리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그 녀석의 입장이라면 정색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 녀석은 부정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복많은 쌍년이네요. 잠깐 살고선 한몫 챙겨서 슬그머니 전 남편한테 돌아온다라… 어휴, 이렇게 남는 장사가 또 있으려나? 새로운 블루 오션 비지니스가 생기겠어요. 명짧은 남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산 수거 전담 와이프 파견 사업. 획기적인데요?”
 
“농담은 그만두고…”
 
“음…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요? 어차피, 그런 이야기를 꺼내신다는 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거잖아요? 그렇지 않으세요?”
 
“부정하진 않을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지. 지금 모호하게 성립된 너나 그녀의 관계… 아내 때문에 그걸 다 포기하는 건 무리야. 지금에 내게는 떠난 아내보다는 너와 그녀가 더 소중해. 아내를 돕게 되면 그것들이 다 들킬텐데 그런 리스크를 안고 도와줄 수는 없어.”
 
“알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 그래서 제가 과장님을 좋아하는 거잖아요. 뭐… 감동의 물결은 잠시 멈춰두고… 확실히 지금 과장님의 입장에서는 저건 굳이 주워줄 필요가 없는 길냥이죠. 더구나 보편적인 상식에서라면 저쪽 편에 가면 저나 파주댁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그러기에는 과장님이 잃는 것이 너무 많아요. 꼴랑 쌍년 전처 때문에 둘을 버리는 건 남는 장사가 아니죠. 하지만… 발상의 전환을 한다면 의외로 모두가 시너지를 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죠. 그러니… 그 요청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봐요.”
 
“엥? 모두가 시너지를 내다니… 뭔 소리야? 좀 알아듣게 말해봐.”
 
나의 질문에… 그녀는 조금 장난끼어린 얼굴을 하고선 나에게 말했다.
 
“이번 일… 저한테 전부 일임해 보시겠어요? 그러면 전처를 도와주면서도 손해보지 않을 방법을 알려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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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녀석은 다시 한번 악의어린 미소를 드리우고 있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도 그것을 거절할 수 없다는 걸 깨닭았다. 며칠 후…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녀의 집에 가서 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걸 반쯤은 동의로 받아들였는지 망설이지 않고 내게 주소를 알려주고 얼른 오라고 말했다. 도착한 곳은 의외로 호화로운 시내 중심지의 고급 주택가였다. 그리고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은 조망이 좋은 고급 빌라였다. 나는 그녀의 집에 화려함에 놀라며 벨을 눌렀다.

“아, 당신 왔어? 고마워… 역시 당신이 와줄줄 알았어. 어… 근데… 저 사람은?”

그녀는 왠지 모르게 임부복인지 속옷인지 모를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목적이 아기 보호인지 유혹인지 모호했다. 하지만… 뭔가 경계를 풀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시야에 들어온 예상치 못한 존재… 세경이에 대해서 당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경이는 웃으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최도영씨. 박세경입니다. 전에 장례식에서 한번 뵜죠?”

전에는 틀림없이 세경이는 아내를 사모님이라고 불렀지? 근데 지금은 최도영씨라고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의미심장한 모습이다. 아내는 그런 세경이의 모습에 당황하여 나를 바라보았다. 해명해보라는 눈빛이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 박세경씨… 나랑 사귀고 있어. 확실하게 말해서 내 애인이야.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해서 이 친구랑 의논할 수 밖에 없었어. 그랬더니 당신 좀 봐야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데려왔어. 미안하지만… 나는 할말이 없어. 이 사람이랑 대화해서 결론을 내길 바래.”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경악했다. 그러는 사이 세경이는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집으로 멋대로 들어와 쇼파에 몸을 던지고 촉감을 음미하듯이 말했다.

“와우… 역시 부자집은 쇼파 쿠션도 느낌이 다르네. 아주 녹아드는 기분이네요. 뭘 멀뚱히 보고 계세요? 앉으시죠. 오실 때 차도 한잔 내주시고요.”

“지금… 남의 집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죠? 불쾌하네요. 저는 당신을 우리 집에 부른 기억이 없습니다. 나가주세요.”

“아항? 그래요? 그럼 그러죠 뭐. 가요, 과장님.”

“자… 잠깐만요.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왜 그 사람은 데리고선…”

“응? 당연한 거 아닌가요? 여기 있는 이 사람… 전에는 당신 남편이었지만, 지금은 제 애인이에요. 그러니 어떻게 하든 그건 제 마음이죠. 이미 정리된 마당에 우리한테 간섭하고 남의 남자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당신이 더 어이가 없는데요?”

아내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세경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말 함부로 하지마! 그리고 내 남편이었어. 네 까짓게 뭔데 지금 내 눈앞에서 내 남편을 두고 제 멋대로 구는건데! 이건 나와 내 남편사이의 일이야. 관련 없는 사람은 당장 꺼져!”

“남편? 어느 남편? 단물 빠지니 뻥 차버린 이 남편? 아니면 등쳐 먹다가 골로 간 저 남편? 동화처럼 정직하게 말해도 두 남편이 다 생기진 않는 것이 유감이네. 너 남편 없어. 지금 이 사람 내꺼야. 함부로 말하지 않을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야.”

그때… 아내의 손이 날아갔다. ‘짜악!!!’ 시원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세경이의 뺨을 날린 아내는 정작 때리고선 분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손을 부들부들 떠는 아내를 본 세경이는… 한번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크악!!!”

예상치 못한 세경이의 폭력에 나도 어이가 없어졌다. 그녀는 제대로 면상을 얻어 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뭐… 뭐야, 아무리 그래도 임산부를…”

“가만히 계세요.”

“하지만…”

“가만히 계시라고요! 또 이 여자한테 속옷까지 털리고 씹다 버린 껌 취급 당하고 싶으세요? 닥치고 거기서 지켜보고만 계세요.”

나는 세경이의 박력 넘치는 말에 할말을 잃고 굳어 버렸다. 세경이는 바닥에 주저앉고 코피를 줄줄 흘리는 아내에게 쭈그리고 앉아 다가갔다. 아내는 흠칫 해서 뒤로 도망치려는데 세경이의 손이 더 빨랐다. 그녀는 아내의 머리채를 쥐고 도망치지 못하게 한 다음 얼굴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이거 웃기는 년이네. 야… 너 세상이 그렇게 우습게 보여? 주변에 사람들이 다들 받들어 주니깐 그게 다 네가 잘나서 그런거 같지? 그래서 그렇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함부로 구는 거겠지? 근데 이걸 어쩌나… 너 너무 심하게 막나갔어. 최소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대가없이 너한테 헌신해주는 사람들은 상처주지 말았어야지. 그리고… 상처 줬으면 최소한 돌아오지 않았어야지… 무슨 염치로 다시 얼굴을 들이밀어? 반반한 상판대기가 그렇게 믿는 구석이야? 확, 스크래치 내놓을까보다.”

아내는 순간 얼굴을 보호하려 팔을 뻗으려 했으나 세경이는 아내의 머리채를 흔들며 다시 소리쳤다.

“예전에도 만만했으니깐 지금도 만만하리라 생각해서 과장님한테 다시 연락한 모양인데… 이걸 어쩌나? 이제 그거 안먹혀. 저 사람 내 남자야. 그러니…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부탁은 들어주지 않을꺼야. 부탁이라는 것도… 최소한의 염치는 담아서 해야지. 뭐? 돈 좀 찔러줄테니 자기 방패막이나 하라고? 어휴… 이걸 정말 패죽여버릴 수도 없고… 미안하지만, 그딴 거 우리는 필요도 없으니 너나 가져. 어차피… 지금 상황 보아하니 얼마나 그걸 누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한번 잘 살아봐. 아니… 잘 죽어봐.

보아하니 오래 버티면 3개월? 그 정도가 댁이 살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겠네. 그 반반한 얼굴에 무거운 몸, 그리고 딸린 화려한 집과 재산들 마침 남편도 없고 도와줄 친척도 없어… 우와. 이거 그냥 평범한 사람도 눈한번 질끔 감고 팔자 제대로 고칠 흉악 범죄 설계들어갈 최고의 상황이다. 조만간 뉴스에서 매장된 시체로 발견된 소식으로 조우하게 되겠네. 그때까지 잘해봐. 우리는 이만 갈테니깐. 혼자서 한번 잘해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염치도 없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결말을 기다리면서 말이야.”

그리고… 세경이는 정말로 아래의 머리채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내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더 할 얘기 없네요. 가요.”

나는 말없이 그녀를 따라 느린 걸음을 걸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세경이가 희미하게 카운터를 세었다.

“셋, 둘, 하나…”

“잠깐만요!!!”

카운터가 끝나기가 무섭게 아내가 달려왔다. 그리고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세경이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아내를 보며 말했다.

“비켜. 얘기 다 끝났어.”

“제발…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그러니깐… 제발 용서해주세요. 이렇게 빌께요. 그리고… 저를 버리고 가지 마세요. 제발…”

“아 씨발… 구질구질하게 질척거리지 마! 얘기 다 끝났다니깐! 먼저 무례하게 군 건 그쪽이거든? 지금 와서 어디 어물쩍 과장님 꼬득여서 다시 마누라 행세하려고 해? 그것도 돈 쥐고선 유세부리면서? 기본도 안된 년 같으니… 그딴 태도로 지금 우리랑 협상을 하겠다는 거라면 내가 해줄 답변은 다시 한방 더 갈겨주는 것이 전부야. 비켜!”

그때 아내는… 비키지 않았다. 대신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며 말했다.

“잘못했어요. 정말로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다시는 안그럴께요. 그러니 제발… 제발 이렇게 가지 말아요. 정말로 두렵단 말이에요. 며칠 전에 그 자식이 문 강제로 열고 들어오려고 했어요. 정말로… 세경씨가 말한 것처럼 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지도 몰라요. 이제는 돈도 필요없어요. 그저 살고 싶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이렇게 버리고 가면 정말로 나 어떻게 될지 몰라요. 다시는 안그럴께요. 그러니 제발… 용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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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처음보는 아내의 모습이다. 이렇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정하는 모습이라니. 항상 신경질적이고 막연히 어려웠던 아내가 맞나 싶었다. 조금 측은함이 들었지만… 손을 써줄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세경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냉혹한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려는 건 페이크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잠시 후… 격한 감정의 교차가 이뤄지고, 우리는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여전히 대화는 아내와 세경만 했다.

“좋아. 도와주겠어. 당신은 여전히 구제불능이지만… 아이는 죄가 없겠지. 아이를 봐서 도와주겠어.”

“가… 감사합니다.”

“대신에… 그 도와준 대가는 크게 치뤄야 해. 당신은 당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어물쩍 넘어가고 돈으로 때우려고 했지만, 그거 그렇게 정산할 일이 아니지. 더구나 어리버리 다시 와이프 포지션 차지하려 한건 말할 것도 없이 시건방진 짓이야. 그것에 대해서도 대가를 치뤄야 할꺼야.”

그녀의 말에 아내는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잠시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조금 용기를 낸듯 대답했다.

“네… 동의할께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훗… 그래도 전남편이니 너무 심하지는 않으리라 믿는 건가? 뭐 너무 기대는 하지 말라고. 내 존재를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과장님은 몰라도 나는 댁을 그렇게 곱게 다룰 생각이 없으니깐 말이지… 그리고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일단 이것부터 얘기해주지. 돈은 필요 없어. 단 한푼도. 당신 다 가져.”

“네? 그… 그래도 그건…”

“금전적인 대가 바라고 했다는 식으로 그림 끼워 맞추게 냅두지 않을꺼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짜는 아니지. 아니, 당신 협박하는 사람들 보다 우리가 더 악랄한 존재일지도 몰라. 우리는 다 가질꺼거든? 보호를 원한다고 했지? 그러면 우리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건 간단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대가로 받쳐. 간단히 말해서… 이제부터 너는 우리 노예야. 이제부터 네게 자유는 없어. 우리가 시키는 것 외에 너는 그 어떤 것도 네 의지로 할 수 없어. 이거… 동의해.”

어지간하다는 나도 기가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노예? 아오… 이게 무슨 망언이야? 하지만 세경이는 진지했다. 그리고 아내도 당황하기는 했지만 어이없다는 표정은 짓지 않았다. 잠시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조금 입술을 깨물고선 대답했다. 

“그거… 당신에 대해서 인가요? 아니면 그 이에 대해서 인가요?”

“당연히 나지. 과장님에 대해서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내가 너를 부릴꺼야. 노예라는 표현은 좀 어색하니 이런 상황이라면 몸종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그거야. 인과관계 이해 못해? 설명이 더 필요해?”

필요해! 난 저게 뭔소린지 도무지 모르겠어! 근데… 아내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뇨. 안하셔도 돼요. 각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구분 짓자는 말이시네요. 알겠습니다. 지금은… 당신이 우선이죠. 제가 나중에 들어가는 입장에서 건방지게 주제넘은 짓을 했던 거군요. 그거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릴께요. 네, 동의해요. 당신이 제 주인입니다. 이걸 인정하면 되나요?”

아내는 영문을 알기 힘든 말을 하며 순순히 세경의 말에 동의했다. 역시… 여자들 말은 쫓아가기가 힘들다. 나는 뭔 소리인지 이해도 잘 안되는데 세경은 그제서야 미소를 드리우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머저리는 아니었네. 다행이네. 임산부한테 체벌하는 건 좀 꺼려졌는데 알아들어서 다행이야. 좋아. 그럼 동의한 걸로 알고… 첫번째 지시를 내리겠어. 벗어.”

“네?” “뭐?”

“벗으라고. 몸종 따위가 건방지게 주인 허락도 없이 옷입고 있지마. 전부 다 벗어. 뭘 망설이지? 여긴 너희 집이잖아.”

아내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잠시 후 깊은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정말로 세경의 말대로 옷을 벗었다. 한커플한커플 옷이 벗겨지자 그녀의 나신이 드러났다. 곧, 그녀는 완전히 알몸이 되었고 그녀는 부끄러운 듯 자신의 배를 손으로 가렸다. 묘한 광경이다. 아내가 임신한 모습… 태현이를 가졌을 때 본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고 배가 불러서 알몸으로 우리 앞에 서있다. 그건… 관능적이라기 보다는 그 이상의 복잡한 감정을 오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경이도 조금 묘한 얼굴이었다. 거만하고 도도한 태도를 취하고는 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의 부른 배를 보면서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배를 가리느라 비부와 가슴은 가리지도 못하고 드러낸 아내의 나신… 정말로 아무것도 없이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잠시 짓던 묘한 표정을 지운 세경이에게 정복자로서의 희열을 느끼게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시 아내에게 지시를 내렸다.

“무릎 꿇어. 배가 불편하니 아예 손으로 바닥을 짚고 엎드려.”

그 말에도… 아내는 조금 수치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알몸으로 짐승처럼 엎드린 그녀가 우리에게 숙인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세경이의 지시는 이어졌다.

“복종의 의미로… 내 발에 키스해.”

순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세경이는 단호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할말을 잃었다. 아내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기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꼬고 그녀에게 내민 세경이의 발등에… 정말로 키스했다. 정말로… 복종을 맹세해버렸다. 나는 그 광경에 기가 막혀 뭐라 할말이 없었다. 이건… 대단히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나이를 봐도 한참 동생 뻘이고 주어진 여건이나 사회적인 입지를 봐도 어느 하나 세경이에게 꿇릴 이유가 없다. 거기다 나와의 관계를 봐도 바로 얼마전에 그녀는 내 아내였고 세경이는 불륜 상대에 불과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그 관계가 역전되어 버렸다. 아니… 역전을 넘어서서 거의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아내는 여전히 그녀보다 못할 것이 없다. 하지만… 단 한가지, 중요한 결정의 실수를 했고, 그것이 지금에 와서 자신에게 절박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는 것 때문에… 도를 넘어서는 굴욕을 강요받고 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자신의 자유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세경이의 노예처럼 보였다. 그것에 대해 그녀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고, 세경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드리웠다. 지시는 이어졌다.

“좋아. 이제 주인님 차례야. 내 주인님에게도 복종의 맹세를 해.”

세경이의 발을 키스를 넘어 거의 핡던 수준으로 입을 대고 있던 아내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체념한 모습으로 나에게 기어왔고, 나는 흠칫한 기분을 느끼며 발을 뒤로 뺐다. 그러자 아내는 당황했고, 세경이는 느긋하게 말했다.

“주인님에게는… 입에 맹세해도 좋아. 그걸 바라시는 것 같네.”

그 말에 아내도 안도한 모습이었다.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왔다. 아내의 모습이 어색해 보였다. 알몸으로 내게 절박하게 입맞추려 다가오는 그녀… 내가 예전에 알던 안하무인이고 제멋대로이던 최도영씨… 나의 아내 맞아? 그녀가 내게 입맞췄다. 그리고 어영부영 내 품에 안기는 모습이 되자 세경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좋아. 이걸로 주종관계는 성립됐어. 앞으로 잘 길들여주지. 지금 이 집… 두명 정도 더 들어와도 상관없겠지? 우리 이 집에 들어와서 살도록 하겠어. 불만은 없겠지?”

“아, 네… 그러세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아내는 세경이의 무단 거주 통보에 동의했다. 오히려… 반기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좋아. 그럼 짐도 챙겨가야 와야 하니… 일단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지.”

“어? 가… 가시게요?”

“당연하지. 짐은 챙겨서 와야 할꺼 아니야?”

“아… 안돼요. 저를 혼자 두지 마세요. 당장 오늘이라도 그 인간이 문을 따고 들어올지 몰라요. 제발…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했잖아요. 데려가 줘요.”

“호오… 벌써부터 주인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매달리는 꼴이라니… 근본이 원래 그 쪽인 모양이네. 좋아. 데려가주지. 하지만, 불필요한 짐은 더 못늘려. 그 상태로 우리를 따라와.”

“네? 지금 다벗은 이 상태로요?”

“당연하지. 괜히 짐늘리기 싫어. 그러니… 그대로 따라와. 뭐, 주위의 시선도 있고 하니… 적당히 천 정도는 두르고 가게 해주지.”

그러면서, 그녀는 곁에 널린 커다란 시트 같은 것을 집어 들어 펼쳤고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나는 알몸으로 겨우 시트로만 몸을 둘둘 감은 아내를 안아들고선 우리 집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하이고… 이러다 검문에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리고 아내도 참 어처구니가 없네. 대체 얼마나 주위에서 괴롭힘을 당했길래 저런 만만치 않은 강압에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는 거야? 왕년에 지랄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 저렇게 비굴한 모습이라니… 도저히 매칭이 되질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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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

집에는 금방 도착했다. 그녀는 두르고 있던 시트를 풀고 우리 집으로 발을 디뎠다. 내가 세경이와 동거하는 원룸을 보면서 그녀는 조금 모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에게는 내가 머물던 원룸에 내 전처가 불륜 상대의 노예로 들어와서 가릴 것조차 없이 서있다는 사실이 기이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런 감상의 시간을 오래지 않았다. 세경이의 말과 아내의 요청대로 하루라도 빨리 우리가 그녀가 살던 맨션에 들어가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별로 짐은 없었다. 세경이는 자기 짐을 대부분 지방에 남편이 사는 곳에 보내뒀고, 나도 파주에 시골집에 보내서 서울 세간살이는 간단했다. 월세를 빼겠다고 집주인에게 통보를 마치고 나니 잘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당연스럽게도 같이 머무는 침대에 올라가 잠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아내의 자리는… 바닥이었다. 세경이는 아내를 전에 처남댁이 와서 묵고 갔던 쇼파 앞에 이부자리를 깔아 주었다. 우와… 정말 노예 대우인가? 침대에 올라올 자격도 없다는 건가?

조금 아내가 딱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세경이에게 일임하겠다고 한 상황에서 나서는 건 규칙 위반이다. 나는 잠자코 그걸 묵인했다. 아내도… 그것에 딱히 저항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날은… 전에 처남댁이 왔을 때처럼 자극적인 상황을 만들지는 않았다. 이사짐을 싸느라 피곤했는지 세경이는 바로 잠들었다. 나는 바로 잠이 오지 않아 조금 뒤척이다가 아래로 내려가봤다. 의외로… 아내도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뭔가 안심한 표정으로…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켜져 있지는 않지만 전기 매트가 아내가 자는 이부자리 밑에 깔려 있었다. 아직 추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임산부라는 것을 감안하여 깔아놓은 건가? 그러고 보니… 어쩌면 바닥에서 재운 것도 익숙하지 않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는 걸 막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세경이 녀석… 말은 험하게 해도 의외로 신경을 써주고 있는 건가? 하지만 나는 녀석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더 의문스러워 질 뿐이었다. 그렇게 원룸의 마지막 밤이 지나고, 우리는 바로 아내의 집으로 이사했다.

“아, 일단은… 어서 오세요. 저희 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내는 같이 들어왔지만 어색하게 먼저 들어가 우리에게 말했고, 나는 좀 어색한 기분을 느끼는데 세경이는 마치 거기가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느긋하고 익숙하게 굴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했다.

“주인과 몸종의 구분은 정확하게 해야겠지? 앞으로 안방은 나와 과장님이 쓸꺼야. 당신은 옆에 골방에서 자도록 해.”

“아… 네. 그렇게 할께요.”

들어온 사람들에게 안방을 빼앗기고 옆에 골방에 처박히면서도 저항을 못하다니… 정말로 몸종이라는 자각을 하고 있는 건가? 세경이는 그런 아내의 복종에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그래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이어서 명령했다.

“좋아. 일단은… 지금 그 뒤뚱거리는 꼬락서니는 추하니 보고 싶지 않네. 골방에 처박혀서 나오라고 할때까지 거기 있어. 과장님, 우리는 같이 우리 방 정리나 할까요? 마이 허니~~~”

아내는 그 지시에도 불만없이 배를 감싸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한번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마주쳤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금 눈쌀을 찌푸리며 안방을 자기 방처럼 뒹굴며 짐을 풀어놓는 세경이에게 조용히 말했다.

“너무 심한거 아니야? 이건 거의 무단 가택 점거잖아.”

“뭐가 어때서요? 집주인, 아니 우리 몸종이 동의한 사항인데요.”

“나도 아내가 나한테 한 짓에 대해 불만이 많아.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한 것 같아.”

그런데 나의 말에 세경이는 조금 진지하게 이렇게 말했다.

“심해야 해요. 그래야 서로 깔끔하게 정산이 돼요. 그렇지 않고 흐지부지 하면 똑 같은 이유로 다시 파탄스러운 결과를 맞이하시게 될꺼예요. 그리고, 과장님은 그걸 심하다고 생각하시지만… 저쪽에서는 도리어 이것 이상으로 더 심하게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을꺼예요. 그래야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자신은 할만큼 했다는 명분이 되니깐요. 아무리 심해봤자 자기 전남편인데 딱히 잃을 것도 없잖아요? 그러니 얼마든지 심하게 해도 돼요. 이건 양쪽 다 암묵적으로 합의한 부분이에요. 그래도… 저는 그렇게 까지 심하게 대하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요?”

부정하긴 힘들었다. 어제 이부자리를 챙겨준 모습도 그렇고 지금도…. 말은 골방에 처박혀 있으라고 했지만 괜히 이사짐 정리하는 거 돕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쉬고 있으라는 말이겠지. 나는 적당히 그녀의 말에 납득하기로 했다. 내 생각대로… 그녀는 순식간에 이사짐 정리를 마치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식사를 준비했다. 슬그머니 나와서 돕겠다고 말하는 아내에게 처박혀 있으라고 호통을 치고선… 말은 저래도 확실히 챙겨주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나는 정리가 끝난 집을 돌아보았다. 살던 원룸은 물론 파주의 시골집보다도 화려하고 세련된 집이다. 내 돈으로 이런 집 사려면 대체 얼마나 더 모아야 하는 걸까? 아내의 전남편이 정말로 상당히 부자긴 한 모양이네. 그런 집이 명의는 아내의 것이겠지만 실제로는 나와 세경이의 집처럼 되버린 건가? 이런 식이라면 인생 별로 어렵지 않네.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잠시 아내가 물려받게 되었다는 재산들의 내역을 흩어 보았다. 그리고 상당히 놀랐다.

“어휴… 이게 뭐야? 건물이 몇채에, 주식에…”

한숨이 나왔다. 정말… 우리 와이프 재혼 잘했구나. 이런 부자를 물다니… 이러니 바람을 피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갑자기 오쟁이질 당하고 납득이 되버리는 내가 있었다. 나는 상속세를 제외하고도 망자가 남긴 것들에 엄청난 규모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그녀가 목숨을 위협당할 지경이라는 것도 납득이 가버렸다. 어이구, 불쌍한 전남편 양반… 이런 재산에, 미모의 아내에, 뱃속에 아기를 두고 억울해서 저 세상을 갈수나 있겠수? 갑자기 그의 사인이었던 실족사의 위력에 대해 전율하며 술을 끊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튼 그의 재산을 보니 정말로 욕심조차 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나눠 먹을 수준이어야 욕심도 나지… 이 정도여서야 원. 그건 모두 아내의 몫으로 돌려주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물론… 지금 아내의 입지를 생각하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하지만. 잠시 후 식사 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다같이 저녁을 들었다. 다행히도, 바닥에 개밥그릇에 음식을 담아서 아내보고 핡아 먹으라는 등의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옷은 여전히 알몸이지만 식사는 제대로 사람답게 했다.

그리고 정리를 마치고 밤이 왔다. 하루 종일 불편한 시간이 계속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어색한 새로운 침실에서 쉬고 싶었다. 그런데… 클라이막스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거기 앉아서… 지켜보도록 해.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돌아버리겠네. 세경이는 아내를 불러서 침실에 의자에 앉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옷을 벗어던지고 나에게 안겨왔다. 야! 야야야!!! 이건 좀 아니잖아! 얼마전까지 아내가 전남편이랑 사랑을 나누는 공간에서… 지금 나랑 네가 하는 것도 과한데… 그걸 또 아내가 보는 앞에서 한다고? 대체 아내를 얼마나 엿먹여야 직성이 풀리는 거냐? 나는 당황하여 몸을 빼려하였다. 하지만… 세경이는 내 귀에 속삭이며 말했다.

“서열을 확실히 해둬야 해요. 이걸 봐야 스스로 인정하게 되겠죠. 자신에게 자유 의지란 없고 제 아랫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싫으시다면 어쩔수 없지만… 대신에 다른 방법으로 저 사람 인정하게 만들 건데 괜찮으시겠어요? 그건 좀 가혹할 것 같은데요?”

“하… 하지만…”

“그리고. 과장님도 적당히 복수를 하세요. 과장님은 자기도 바람폈으니 피장파장이라고 하지만… 가정을 깬 건 정확하게 저쪽이에요. 그러니 이 정도는 당하는 것도 싸요. 저쪽도 각오를 하고 있을꺼예요. 그러니… 안아주세요. 평소보다 더 격렬하게… 그래야 복수죠. 우리 사랑스러운 노예가 후회스러운 생각이 들만큼…”

나는 세경이를 바라보고 다시 아내를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다시 세경이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세경이에게 거칠게 들어갔다. 약간… 처남댁과 정사에서나 할법할 정도로… 세경이가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거칠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조금 더운 원룸과는 달리 냉방이 잘된 서늘한 공간에서도 우리는 땀방울을 구슬같이 흘리며 격하게 정사를 나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내 예전 아내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우울한 표정이었지만,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노출증을 유발하였을까? 나는 뭔가 평소보다도 더 자극적인 기분을 느끼며 세경이를 거칠게 범했다. 오늘만은, 그녀에게 배여있는 그녀 남편의 담배 냄새마저도 나의 욕망을 자극하는 휘발유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것을 화려하게 불태우며 피니쉬에 돌입했고, 우리는 신음을 토하며 절정에 치달았다. 그렇게 정사를 마치고 숨을 고르는데… 세경이가 먼저 일어섰다.

그녀는 무아지경으로 맛이 간 눈동자를 하면서도 빨리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곁에 놓인 물을 마시고 비부에 애액을 닦아낸 다음에 입으로 내 것도 깨끗하게 해준 다음에 고개를 돌려 아내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린 것은 아내였다. 하지만… 그녀는 한번 피식 웃어보인 다음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당황하는 그녀의 뒤로 돌아가 그녀의 무릎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갑자기 강제로 확 벌리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과장님… 우리 노예도 상당히 준비가 된 모양이네요. 다음 차례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