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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무난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괜찮은 직장에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승진. 나는 잘 모르겠지만 주변에서는 꽤 미인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집사람. 그리고 아직 어린 아들 하나. 남들이 보면 정말로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삶에서 종종 느끼는 공허함 같은 것이 있었다. 
 
목적의 부재랄까? 뭔가 집착 같은 바람이 있는 것 없이 그냥저냥 사는 것에 나는 뭔가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험을 꿈꾸지만 실제로 도전하기는 힘든 것처럼,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전반을 뒤흔들지도 모르는 무리한 시도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깐. 그냥 그대로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항상 그런 무난한 시간을 깨는 상황의 변화는 뜻하지 않게 다가오기 마련인 모양이다.
 
그것은 처가의 식구와 같이 떠난 여름 여행에서 본 어느 강렬한 광경에서 시작되었다.
 
“괜찮으세요?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운전하느라 힘드셨죠? 그이처럼 좀 들어가서 눈 좀 붙이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애들 물가에 있는데 가있어야죠. 집사람만 애들이랑 두면 짜증낼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나를 걱정하는 그녀를 보았다. 수수한 얼굴에 순한 인상으로 나를 걱정하는 그녀는 나의 처남댁이다. 조금 가무잡잡한 피부에 키가 남자들만큼 크고 볼륨감있는 몸매를 가진 그녀는 딱히 인상깊은 느낌은 없었다. 그녀가 내 처남의 아내라는 것이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리 주목할만큼 빼어난 미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순한 인상이 실제 얼굴보다 더 수수한 느낌으로 마이너스가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참 괜찮았다.
 
지금 보는 것처럼 처가 식구들을 데리고 피서지로 장시간 운전을 한 나를 걱정하는 건 이 사람 밖에 없었으니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왠지 모르게 처가에서 점점 마음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내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면, 그건 단순히 장시간 운전에 따른 피로가 밀려와서가 아니라, 정말로 처가와의 동반 여행이 마음이 즐겁지 않은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것도 없이 피곤하다고 방에 들어가 잠든 처남처럼 늘어질 수 없다는 것이 처가를 대하는 사위의 불편함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나가보겠다고 말하고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수영장으로 나간 아내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녀는 짐 정리와 저녁 준비를 하겠다면서 남았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도 조금 지루해질 무렵에 나는 방으로 잠시 돌아왔다. 아이들을 닦아줄 수건이 부족해서 가져와달라는 아내의 부탁 때문이었다. 별다른 생각없이 조금 지름길로 여겨지는 숲을 가로질러서 숙소의 베란다 쪽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왔는데… 그때 예상치도 못했던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아앙… 아흑! 오빠, 거… 거긴… 아아앙…”
 
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과 신음에 경직되어 버렸다. 들켰다면 상당히 어색한 상황이 되어버렸겠지만, 베란다로 향한 사각에서 온 덕분인지 나는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은 나를 보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본 광경은 바로, 처남과 처남댁이 벌이는 정사 장면이었던 것이다. 방금 전에 나에게 자기 아이까지도 부탁했던 순한 인상의 처자가 지금은 쾌락에 간드러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안돼요. 이제 슬슬… 아가씨와 시부모님이 돌아오실 텐데… 어서… 어서, 마치지 않으면… 아아앙!!!”
 
상당히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언급했다시피 미인은 아니다. 그래서, 흔한 야동을 보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정말로 그런 영상에 나오는 노린 듯한 광경은 아니었으니깐. 하지만 뭐랄까, 평소에 조금 촌스런 인상을 가지고 있던 그녀가 자기 남편의 품에서 쾌락에 허덕이는 장면은… 왠지 모르게 대단히 선정적인 느낌을 들게 해주었다. 흥미로운 일이다. 어딜봐도 그런 것과는 연관짓기 힘들었던, 나와는 무관한 여자에게서 그런 기분을 느끼다니… 그러면서 조금 자세히 보았다.
 
그랬더니 뭐랄까… 조금 인상적인 부분들도 눈에 들어왔다. 체격이 아내보다 좋은 덕인지 상당히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가 어우러지니 얼굴은 좀 아니어도 몸매만은 의외로 보기 좋았다. 그리고, 체질 탓일까? 상당히 땀을 많이 흘려 마치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번들거리는 몸에 광택이 흘렀다. 그리고 속옷으로 가려지는 가슴과 하복부에는 그런 가무잡잡함과 대비되는 그을리지 않은 하얀 피부가 도드라져 나름… 후끈한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조금 더 감상을 하고 싶었지만, 들켜서 민망한 상황을 만들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멀어졌다. 그리고… 멀리서 절정으로 가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여운을 두고 옷까지 다 챙겨 입었으리라 짐작될 정도로 기다려 준 다음 정문으로 향했다. 
 
“아, 오셨어요? 수건이요? 잠시만요.”
 
그녀는 돌아온 나를 평소와 마찬가지로 해맑게 대했지만, 정사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번들거리는 땀과 보이지 않는 속옷 라인… 한참 동안 공허함을 느끼던 나에게 있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강렬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나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덤덤하게 표정짓고 수건을 받아서 너무 오래 기다리느라 화를 내는 아내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로 휴가는 딱히 이렇다 할 기억없이 무던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그 기억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흥분의 여운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휴가는 즐거우셨나요? 여기 부재중 업무랑 이번 주까지 하셔야 할 일들 요약입니다. 다른 이슈 사항이나 지시하실 것이 더 있으신가요?”
 
“아아… 그래. 없는 동안 수고 많았어. 이거 다 처리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군. 오늘 야근 좀 할 수 있나?”
 
나의 말에 그녀는 조금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안경으로 보이는 눈빛을 반짝였다. 하지만 이내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좀 피로하실 것 같은데…”
 
“괜찮아. 부탁 좀 할께.”
 
업무는 다행히도 상당히 빨리 처리해냈다. 확실히 수완이 좋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자기 선에서 처리할 것은 다 처리해두다니. 저녁 7시, 나는 업무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시와는 달리 그녀는 이미 사무실에서 퇴근한지 오래였다. 나는 평소보다는 조금 덜 덤덤한 기분으로 밖으로 향했다. 회사 인근을 벗어나 어느 호텔에 들어서서 메시지를 확인하고 그 방으로 들어갔다. 
 
“아, 조금 늦으셨네요.”
 
거기 목욕가운만 걸친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근이라는 말은 우리들의 은어. 먼저 가서 호텔을 잡고 기다리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말에 응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는 나의 아내다. 진짜 아내가 아니라 불륜처, 이른바 오피스 와이프라는 존재인 것이다. 일단 나는 별다른 말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대로 머리를 당겨 입맞췄다. 두주 만에 맛보는 그녀의 입술을 달콤했다. 그리고, 타액이 흐를 만큼 긴 입맞춤이 끝나고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가운의 앞섭을 확 펼쳤다. 당연히 그녀는 속에 아무것도 없었다.
 
약간 슬렌더한 몸매… 그리고 평소에 회사에서는 안경에 틀어올린 머리를 하고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그녀는… 전혀 닮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내 안에 있는 미묘한 열기를 태울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그녀를 안고 그대로 침대로 쓰러졌고 그리고 다급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그녀를 격하게 안기 시작했다. 샤워 후에 느껴지는 쉬크한 향기를 만끽하며 평소보다도 더 거칠게 그녀를 안았고,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하아… 과장님. 좋아요. 너무… 아아앙!!!”
 
그녀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득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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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그녀를 만난 것도 벌써 몇 년전의 일이다. 그녀는 우리 회사에 단기 경리 직원으로 채용된 비정규직 직원이었다. 당시에 나는 재무 부서에 발령난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고, 그래서 나나 그녀나 부서에서 초짜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당시 채용된 여직원들은 대략 10여명… 그 중에서 그녀는 그렇게 튀는 존재는 아니었다. 지금은 나름 미인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지나치게 교과서적으로 엄격하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그렇게 여성적인 매력을 가졌다고 하긴 힘들었으니깐.

하지만 업무적으로는 학교 반장 같은 이미지처럼 상당히 우수했다. 그래서, 한동안 영업직에서 근무하다 생소한 부서에서 고생을 하던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업무적으로 좀 고마운 존재라는 것이 그녀에 대한 생각의 전부였다. 그리고 어차피 단기 경리 파견들이니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다른 곳으로 갈 사람들이기에 별다른 인연이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예상치 못한 일을 맞이하며 반전이 일어났다.

“아… 저, 저기… 아닙니다. 이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니에요. 과장님, 오해하시면 안돼요.”

오해를 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상황이 오해할 수 밖에 없었다. 밤 12시가 넘어 대부분 불이 꺼진 사무실… 그리고 반라의 여직원과 그 여직원 앞에서 바지 춤을 풀고 물건을 내놓고 있는 같은 부서의 말년 대리… 내 시선과 마음이 차게 식어가는 것을 나 스스로도 느꼈고, 그 녀석은 황급히 바지를 올리며 소리치며 도망쳤다.

“진짜로 아무 일도 아니라고요. 다들 그냥 그렇게 하는 거라고요. 과장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라고요. 아이씨… 암튼 전 갑니다.”

그리고 녀석은 내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서둘러 도망쳐 나갔다. 나는 남겨진 여직원을 바라보고 말했다.

“증인이 필요하다면… 내가 되줄께요. 그리고, 입가에 묻은 거… 병원 가서 채취해서 증거 보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무튼, 회사를 대신해서 사과하죠. 그리고 원하는 조치에 대해 최선을 다해 협력하겠습니다.”

너무 차갑게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내가 생각한 직장 내 성추행을 당한 여자가 보일 정상적인 느낌과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혀를 내밀고 입가에 묻은 허연 걸 낼름 핡아 먹었다. 그러더니, 바닥에 떨어진 자켓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것이었다. 사무실에서 금연인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데 그녀가 말했다.

“참… 오지랖도 가지가지 하시네요. 자기 일도 아닌 일에 왜 이리 참견이시죠?”

조금 당황스러웠다. 뭐지? 이 반응은?

“내가… 쓸데없는 일을 한거라는 말투군요. 혹시… 둘이 몰래 사귀는 사이였나요? 그런 거라면 눈치없이 행동한 거 사과하죠.”

“아뇨. 그럴리가요. 저 남자친구 있어요. 하지만… 쓸데없는 일을 한 건 맞으세요. 공들여 작업한 걸 그렇게 한순간에 날려버리시면 어떻게 하세요? 덕분에 연장계약 다 망쳤잖아요.”

“연장계약? 아… 그러고 보니 파견 만료 얼마 안남았던가요? 근데… 그게 연장 계약이랑 무슨 상관인 거죠? 저 친구가 인사 담당자도 아닌데 그런 걸 맘대로 연장해줄 리가 없잖아요? 저 친구가 뭘로 꼬득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속은 것 같은…”

“순진도 하셔라… 정말로 여기 온지 얼마 안되셨다는 말이 맞나보네요. 파견인 저보다도 여기 상황을 모르시니… 과장님, 정말로 모르셨어요? 회사에서 암묵적으로, 파견된 직원들 중에서 여기 남자 정규직들 오피스 와이프가 되면 계약 연장에, 경우에 따라서는 정규직 전환도 시켜 준다는 사실을?”

“……”

정말로 몰랐다. 아니, 이게 무슨 개막장 블랙 회사 이야기야? 근데… 그게 우리 회사 이야기라고? 그녀의 설명은 이랬다. 대외적으로 공표하지는 않지만, 회사 내에서 끗발이 좋은 인사 부서와 재무 부서는 암묵적으로 그런 파견직을 개인 업무에 비서처럼 쓰는 것을 용인한다는 것이다. 단순하게는 업무 보조와 비서 역할이지만, 그게 좀 더 나가면 정말로 은밀한 일까지 봉사하거나 대외 접대에 몸으로 때우는 일에도 쓰는 직원으로서 사실상 오피스 와이프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규직을 그런 일에 쓰게 되면 당연히 난리가 나니, 대상은 항상 파견직으로 오는 비정규직들. 그네들에게 계약 연장과 정규직 채용을 미끼로 단기 파견 중에 그런 정직원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일하다가 정규직들에게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간택된 사람에게 업무 평가를 빌미로 설문 조사를 해서 적당한 선에서 의견을 받아 연장을 해준다는 것이다. 우리 회사에서는 잘 몰라도 파견 회사들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는 모양이다.

“그래서… 좋은 대우 받으면서 일하고 싶으면 저희들도 필사적일 수 밖에 없죠. 근데… 그게 저는 좀 만만치가 않더라구요. 제 성깔이 좀 더러운 탓일까요? 나름 얼굴이 빠진다고는 생각을 안하는데 좀처럼 저랑 엮이려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파견 만료는 얼마남지 않았고, 이러다 정말로 파견 측에서도 욕먹고 저도 이렇게 복리후생 좋은 회사에 못있을 것 같아서 마지 못해서 그중에서 제일 인기 없는 사람으로 하나 작업 걸었던 거예요. 근데… 그걸 거하게 깽판을 쳐버리셨네요. 따지고 보면 제가 하나 엮지 못한 건 과장님 탓도 큰데 말이죠.”

“내가 뭘?”

“발뺌하지 마세요. 지금가지 파견된 직원들 중에서 제가 과장님 업무 제일 많이 전담했잖아요. 왜 자꾸 저를 찾으세요? 암묵적으로 영업부서에서 발령난지 얼마 안된 사람은 터치하지 말라는 규칙 덕분에 엮일 여지도 없는 분이 저를 붙들고 계시니 제가 다른 사람들이랑 엮일 여지가 없잖아요. 다른 애들은 벌써 오피스 신혼여행도 가는 모양인데, 저만 아무것도 못건지고, 덕분에 이번 파견 아주 제대로 망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정말로 분통이 터지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뭔가 생각해 냈다는 듯이 말했다.

“어라? 근데 생각해보니… 차라리 이 쪽이 나을수도? 아하! 마침 잘됐네요. 기왕에 이렇게 된 거 과장님이 책임져 주셔야겠어요.“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봐요. 내가 박세경씨한테 업무를 많이 맡긴 건… 다른 직원들과 달리 세경씨가 업무 처리 능력이 우수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런 말하기도 꺼려지는 일이 우리 회사에서 벌어지는 줄은 전혀 몰랐어요. 정말이지 여기서 적응이 안되는군요. 그리고 책임을 져달라고요? 대체 뭘… 서, 설마?”

“네 그 설마에요. 남자답게, 책임지고 저랑 결혼해 주세요.”

“이것봐요! 난 지금 아내가 있거든요.”

“저도 남자친구 있다니깐요. 누가 정말로 결혼해 달래요? 오피스 와이프로 삼아달라고요. 어디까지나 회사 안에서만 용인되는 과장님 여자로 삼아주세요. 아마 과장님도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닐거라 생각하는데요?”

나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가라앉은 사무실에 반라의 몸이 선정적이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왠지 모르게 용인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나랑 나이 차이도 심하고 업무적으로 연결된 사람과 그런 관계라니… 거기다 그녀가 말하는 와이프라는 단어의 울림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거절하죠. 박세경씨한테는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거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상관할 일이 아니었는데 참견한 건 사과하죠. 그리고… 도움이 필요없다면 먼저 일어서죠.”

그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그때 그녀가 말했다.

“괜찮으시겠어요? 저… 생각보다 산전수전 다 겪었어요. 그리고, 나름 절박하기도 하고요. 만약에 저를 안지 않으신다면… 지금 정황으로 보이는 사내 성추행의 누명을 그 멍청한 만년 대리가 아니라 과장님한테 뒤집어 씌울수도 있어요. 그래도 좋아요?”

나는 멈춰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표정은 담담하지만 협박이다. 나는 그녀에게 짧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좋을대로 해요. 그래도 나는 그런 일에 끌려다니지 않을 꺼예요. 설령 누명을 쓴다고 해도.”

그리고 나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퇴근했다. 사실, 허세는 부렸지만 겁은 났다. 나름 유혹적인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던 건 나중에 따라올 리스크가 더 두려웠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의외로 다음 날 사내에서 성추행 당했다고 방방 뛰는 일은 없이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적으로 나를 대했다. 다소 삐질거리며 내 눈치를 보는 만년 대리 외에는 그런 일은 마치 없었다는 듯이 조용한 일상이 이어질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인연은 의외로 금방 다시 돌아왔다.
1부

“주말에 왜 출근을?”




“그러는 과장님은요?”




내가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아내가 외출했다. 아이는 가까이 살던 처남댁에게 맡기고. 모처럼 같이 보내는 주말이라 생각해서 기대했었는데… 그녀는 가지 말아달라는 나의 말을 거절하고 동문 모임에 가버렸다. 왠지 모르게… 조금 의심스러운 모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입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그냥, 홀로 남겨져서 하릴없이 멍하게 있는 대신 회사 출근을 해서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소심한 자학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녀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말없이 내가 하는 잔업을 도왔다. 그리고 유능한 그녀는 순식간에 일을 마무리했다. 이제는… 자학할 핑계도 없어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텅빈 집에 돌아가야 하나?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빛이 조금 의미심장했다. 그녀는 커피를 끓여와서 나에게 건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으세요? 왠지 우울해 보이시는데요? 주말에 자발적으로 출근해서 잔업이라… 집에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그거야 말로 정말 괜한 참견인데? 하지만… 일단은 고마워.”




“뭐가요?”




“일 도와준거. 그리고… 모함하지 않아 준거.”




내 말에 그녀는 왠지 모르게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러면서 말했다.




“아아… 정말 못당하겠네. 그게 뭐라고 고맙단 말을 해요? 사람 죄의식 느끼게 시리… 그렇게 말하면 막 굴러먹고 사는 년 낯뜨거워지잖아요.”




“본인에게 너무 심한 말 아니야? 막굴러먹던 년이라니… 그런 말이 어딨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만류했는데 그녀는 좀 진지하게 반색했다.




“아뇨. 사실이에요. 저, 막 굴러먹던 애 맞아요. 중학교 때 계부한테 성추행 당하고, 엄마한테 집에서 내쫓겨서 가출생활. 길거리 애들이랑 팸으로 살다가 원조교제. 그러다 어리버리 윤락업 종사.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름 업소에서 아저씨들 등골 빼먹고 살았어요. 과장님은 뭔가 회사에서 벌어지는 오피스 와이프 같은 거에 당황하시고 저한테 미안한 표정까지 지어 보이시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전에 겪은 일에 비하면 나름 애들 장난 수준도 안되는 일이라서 오히려 난감하네요.”




나는 그녀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늘어놓는 이야기의 무거운에 학을 떼었다. 뭐야… 이거?




“그… 그런 일을 겪은 거야? 세상에… 아니 근데 어떻게 지금은 여기서 파견 경리 직원을…”




“뭐… 나름 철들었죠. 언제까지 그렇게 살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슬슬 그만두려는데 마친 사고가 터졌죠. 일하다 어떤 사건에 엮여서 죽을뻔한 일이 있는데, 그때 무슨 탐정처럼 도와준 같은 가게 일하던 애가 있었어요. 걔가 충고해 주더라구요. 제가 가진 능력이 아깝다고 다른 일 찾아보라구요. 그리고 겸사겸사 손님이던 남친도 사건 겼더니 진심으로 대해줘서 정말로 남친이 되고… 그러다 보니 그냥 관두고 마음 잡고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다시 공부해서 검정고시 패스하고 경리 공부하고 이전보다 훨씬 페이가 적은 일을 하게 된거죠. 그래도… 여기 와서도 마냥 깨끗하게 일하기는 어렵지만요.”




뭔가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할말을 잃은 나에게 그녀가 말했다.




“저야 말로 건방지게 군거 사과드려요. 저를 도와주시려고 하신 과장님한테 제가 너무 까불었어요. 용서하세요.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일어서서 내 앞에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 하고 말했다.




“불쾌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저번에 말씀드린 그거… 다시 생각해주실 수 없을까요? 오피스 와이프…”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나는 즉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난번 보다 진지한 그녀의 태도와 아내의 불만스러운 행동… 그것이 영향을 미친 덕분인지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정말로…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어요. 전에 그런 걸 엮을려고 한 이유는 여기 회사에 좋은 대우가 탐났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지금은 과장님과 좀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걸 바래요. 원치 않으신다면… 그런 성적인 것은 제외하고 업무적으로만 서포트 해도 상관없어요. 저를 거둬주실 수 없으실까요?”




나는 거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다가온 얼굴을 마주하고 키스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좀 찔리지만 성적인 부분을 배제하지도 않았다. 그래 변명할 수 없는 불륜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후로 조금 공허한 내 삶에 조금이나마 편리함과 즐거움이 되어 주었다. 파견 계약은 연장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후로 내 곁에서 업무 보조를 하며 명실공히 내 오피스 와이프가 되었다. 오피스 와이프도 아내라면 그녀는 나의 새로운 아내겠지. 그것은, 그녀가 남자친구와 결혼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일과 가정은 분리해야죠. 저는 과장님과 헤어질 생각이 없는데요? 저 버리실 꺼예요?”




“하지만… 세경씨는 이제 남편이…”




“건설회사 일하느라 신혼부터 주말부부에요. 그리고 제 과거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의외로 그런 거에 우리 부부 쿨한 편이죠. 그리고그 사람 지방에서 현장 들어가면, 거기서 현지 여자들이랑 동거하는 거 일종의 회사 관례인 모양이던데요. 거기 터치할 마음 없어요. 그러니 저도 터치받을 이유 없죠. 걱정하지 마세요. 제 남편이랑 만나서 얼굴 붉히고 핏대 세울 일은 절대 없을꺼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의 관계는 그녀의 결혼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의외로, 그녀는 나 이상으로 자기 남편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주말에는 확실하게 그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나와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근무의 연장선에서만 유지되었으니깐. 그런 미묘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일단 불만은 없었다, 말했듯이 그녀는 업무적으로 유능하고, 아내로서도 대단히 만족스러운 상대였으니깐. 특히나 지금처럼 뭔가 가슴속에 묘한 불길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그걸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더할 나위가 없이 좋았다. 하지만 조금 들떠 있었던 걸까? 정사를 마치고 그녀가 나신을 내 몸에 파고들며 나른하게 물었다.




“오늘은 조금 묘하네요. 과장님 답지 않게 격렬하고 집요하고… 뭔가, 기묘한 느낌? 마치 저를 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이 녀석… 정말로 머리도 좋고 감도 좋다. 나는 그녀에게 솔직히 사과했다.




“그래 보였나? 미안해. 세경씨한테 집중하지 못했나 보네.”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색다른 느낌이 나름 좋았으니깐요. 근데, 누굴 떠올리신 거예요? 사모님? 가족 여행에서 조금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셨나요?”




누구인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그냥 쓴웃음으로 다른 사람이라면 불쾌해 했을지도 모를 상황에서도 나른하게 즐거워 하는 그녀에게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나에게 캐묻지 않았다. 항상 나를 곤란하게 하는 짓은 하지 않는 여자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한번 정도 더 할만한 시간인가? 그래서 그녀는 내 의사를 묻지 않고 마치 뱀이 내 몸을 타고 기어내려 가듯이 내 하단으로 몸을 부비며 움직여 내 물건을 붙들고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전화가 왔다.




그녀는 전화가 울리는 것을 흘깃 보았다. 그리고, 전화를 건 상대가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조금 더 장난끼 어린 미소를 드리우며 더 격렬하게 애무를 했고, 나는 그것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왠일이지? 야근한다고 연락하면 따로 전화해서 찾지는 않는 아내인데? 그런 의문을 떠올리며 나는 전화를 받았고, 전화기에서 익숙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손을 뻗어 내 물건을 목구멍 깊숙히 머금은 그녀의 머리를 붙들어 멈췄다. 그녀가 당황해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보았다. 나는… 더듬거리며 아내에게 되물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돌아가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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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정승댁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줄을 서지만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안온다고 했던가? 그 말 그대로 장인, 장모의 장례식장은 다소 한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름 사업을 크게 하시던 장인이었기에 항상 대단해 보였었는데 이런 초라한 장례식이라니… 하긴, 나도 그런 말할 입장은 아니지. 불륜 관계 중에 부고를 들은 사위가 할말이 있을리가. 아마도 한창 세경이와 정사를 나누고 있을 무렵에 장인과 장모를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셨던 모양이다. 조금… 죄의식마저 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애써 떨쳐내려고 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망연자실한 처남과 그를 위로하며 흐느끼는 처남댁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아직 어린 그녀의 딸도… 죄의식을 말하고는 있지만 조금 담담한 느낌의 나와는 달리 그들은 정말로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앞으로… 괜찮을까? 이전부터 사업에서 조금 미덥지 못하다는 처남의 일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서 조금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분들이 고인이 된 이후에… 우리의 시간도 아마 이전과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처남댁을 보았다. 갑자기 전에 피서지에서 보았던 강렬한 장면이 눈에 떠올랐다. 그날의 장면이 왠지 모르게 검은 상복을 그녀의 모습에 겹쳐 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건 또 역시나 묘한 기분을 들게 해주었다. 역시, 좀 의식하고 있는 건가? 나는 애써 시선을 돌리려 노력했다. 다행히도 세경이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담한 녀석이다. 회사에서 부고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장례식장에서 일을 돕겠다고 왔다. 나는 정말로 성실히 도우미 역할을 하는 녀석을 보며 쓴맛을 다셨다.

장례는 무사히 발인까지 마쳤다. 녀석은 발인에 입관까지 동행하는 정성을 보여주었다. 장례를 마친 이후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는데, 녀석이 바란 것은 평소에 늘 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부재중 업무를 마쳐야 하고 이후에 처리해야 할 일들도 좀 있어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만난 모텔에서 내 물건을 애무하는 그녀에게 조금 당황스러운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이혼하신다고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세요? 장례 끝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게, 그렇게 됐어. 아마도 장인이랑 장모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어서 참고 있다가, 돌아가시고 나신 이제서야 말을 꺼낸 모양이더라구.”

“우와… 역시 저 때문인가요? 장례식장에 가서 그리 튀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조금 미안해하는 세경이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사유는 아내 쪽이야.”

“네에?”

쿨한 그녀도 놀라는 표정을 짓기는 하는구나. 사실, 알고 있었다. 아내가 나랑 결혼하기 전에 열렬히 사랑하던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유부남이었고, 당연히 집안에서는 반대했다. 그래서 떠밀다시피 선자리에 내몰아서 나를 만나게 되고 나는 적당히 예쁜 부자집 딸인 아내랑 결혼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살면서도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내는 항상 어딘가 멀리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은 다시 연락이 닿았고, 아내가 외도를 시작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적당히 눈치를 채면서도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내연남은 이혼하고 싱글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절대 반대를 외치던 부모님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시다. 그녀에게 망설일 이유는 없었던 모양이다. 장례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고 이혼을 통보하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놀랄만큼 차분했다. 나는 어쩌면 아내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녀도 참으로 담담하게 이혼 절차에 대해서 논했다. 우리는 그걸 논의하며 서로 가진 감정이 오로지 차분함 밖에 없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결과는 금방 나왔다. 일단 아이는 내가 키우기로 했다. 정기 접견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위자료는 서로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그야말로, 우리가 살던 집에서 그녀와 그녀의 물건만 사라지는 걸로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그렇게 나는 부고에 이어 이혼이라는 일까지 상당히 무덤덤하게 마무리 해버렸다.

내가 너무 감정이 메말라 버린 걸까? 하지만 일말에 드는 미묘한 여운은 있었다. 이제 내가 처가와 엮일 일은 없어졌다. 그렇다면… 더 이상 처남네 집과도 무관한 사이란 얘기다. 그날의 묘한 선정적인 모습이 여전히 머리 속에 여운을 주었지만 나는 그걸 희미한 기억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더 이상은 엮일 일도 없는 관계가 되버린 사람이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 하고 오랜만에 세경이를 찾은 것이다. 미련은 없어도 공허함은 깊었던 걸까? 나는 그간의 일을 얘기하며 조금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표정이 좀 묘해졌다.

“우와… 저는 과장님은 절대 이혼 같은 거랑 무관하신 분이리라 생각했는데… 좀 예상 밖이네요.”

“실망시켰다면 미안하네. 좀 아쉬운가? 어쩌면 이혼이 좀 일렀으면 세경씨가 결혼하기 전에 매달렸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애써 농담을 했다. 근데 그녀는 좀 진지하게 그걸 받았다.

“그러게요. 그럴 줄 알았으면 남편이랑 결혼하지 말고 좀 기다릴걸 그랬어요. 너무 서둘러서 망했네요.”

“어이어이…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치지 말라고. 괜히 중년 돌싱남 설랜다.”

“왜요? 저는 과장님 좋은데… 나름 진지하게 와이프 역할했다고 생각하는데 부족하셨어요?”

“지갑에 사진 보니 남편 잘생겼더구만… 거기다 연하랬던가? 훈남 남편 슬퍼할꺼야.”

“그 인간은 얘기도 하지 마세요. 얼마전에 내려갔더니 머리가 다 쥐어 뜯겨서 속옷차림으로 제 뒤에 숨더라구요. 어디서 그런 꽃뱀이랑 엮여가지고… 좀, 그년이랑 머리 끄댕이 제대로 잡았죠. 한건 해결해주니 고맙다고 역시 나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여자는 말이죠, 자기를 리드하고 책임져주는 남자를 좋아해요.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같은 시기에 하나를 골라야 했다면 저는 과장님을 골랐을 꺼예요.”

기분이 복잡했다. 아내에게 사랑받지 못하면서, 지금 나보다 한참 어린 처자한테 무의미한 호감을 사고 있는 내 인생도 참…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오피스 와이프니깐 아내라면 아내인건가? 뭔가 기분이 더 미묘해지네. 아무튼 나는, 짜증이 난다고 말하면서도 남편에 대한 얘기를 할 때 항상 웃는 세경이를 보면서 늘 그녀와 나의 거리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나를 보면서 말했다.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아직 아드님도 어리고, 아무리 그래도 집안에 사람이 빠져나가면 많이 힘드실텐데요…”

“뭐, 일단은 아이는 돌봐주시는 도우미 이모님이 시간 연장해서 더 봐주시기로 하셨어. 그리고 다른 것들은… 차차 감수해 나가야지. 이제와서 다른 남자한테 안기겠다는 여자한테 가지 말라고 매달릴 수도 없고.”

“정 불편하시면… 저라도 좀 가서 도와드릴까요?”

솔직히… 반가운 제안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뻔뻔했다면 그렇게 해달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무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한테 보일 사람은 아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고, 그녀는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몇주 후에 나는 정식으로 아내와 이혼했다. 이미 그 이전에 짐들도 다 빠져나가고 아이와도 작별한터라… 서류 상의 변동 외에 큰 감정의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인생이 고되어 진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이혼 후 몇 달이 흘렀다.

“아,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네 오래 고생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더는 무리시겠죠.”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기 꺼려하는 도우미 이모님을 보며 괜찮다고 말했다. 좋은 분이셨다. 우리 아들이 엄마 보다도 더 잘 따르는 분이셨고, 살림을 도와주시거나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하원 시켜주시는 일을 도맡아 주신 은인이셨다. 하지만… 연세가 좀 있으셨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슬슬 일을 그만두려고 하셨는데, 도저히 이혼한 후의 우리 부자를 두고보기 힘들어 버티셨던 모양이다. 근데, 관절과 허리에 무리가 와서 더는 어려우신 모양이었다. 페이를 올려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괘념치 말라고 일을 그만두시는 걸 동의했다. 그녀는 여전히 미안한 표정으로 남은 아이를 걱정했다.

“태현이가 왠지 요즘 아토피가 더 심해져서 이런 때에 저도 말씀드리기가 죄송해요. 어떻게… 다른 돌봐줄 사람은 없으실까요? 가능하면 아토피 요양 삼아 시골에 계시는 지인 분이 있으면 거기 보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검토해 볼만한 의견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시골에 사시던 집한 채만을 남기고… 문득 부모님이 은퇴하시고 사시던 그 전원 주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내는 시골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거기다 시댁이라는 것 때문에 더 가지 않아서, 그 집은 지금 거기서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그런 곳이라면 아들에게도 좋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갈수는 없었다. 당장 회사에서 한참을 가야 하는 그곳으로 이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밤중에 나는 잠든 아들이 몸을 긁는 것을 보았다. 상채기가 난 피부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엄마의 부재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깊은 시름이 왔다. 어린 녀석이 나름 나를 배려해서 참고 있는 걸까? 아니면 엄마에게 버림받았다는 마음 같은 걸 느낀걸까? 어느 것이든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이제는 돌봐주시던 도우미 이모님도 얼마 후에 그만두신다는 것에 대해… 나는 막막함을 느꼈다.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좋았을 것을… 아니면 아내랑 이혼을 하지 않았거나… 그런 생각을 해봐도 다 의미없는 것들이었다. 장시간 회사에 가서 집을 비우는 나를 대신해서, 이 녀석을 돌봐줄 사람이 없을까?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우리 아들이 잘 따랐던 내가 아는 한 사람… 처남댁이었다. 종종 아내는 아이를 처남댁에게 맡기곤 하고 아이도 처남댁을 엄머처럼 잘 따랐었지. 아쉬움이 또 든다. 이혼하지 않았으면 그곳에라도 빌붙어 볼 수 있었을텐데… 

그러면서 문득 그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은 어떻게 잘 지내고 있으려나? 아내와 헤어진 이후 연락도 두절되었다. 나는 지금 내 처지가 어렵게 되어서야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잠시 의식 속에 묻어둔 그날의 기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