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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 45분.에 출발하는 서울행 새마을호 열차의 탑승이......>

유리는 무미건조한 안내원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부산역을 빠져나왔다. 역을 빠져나오자 8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유리의 뽀얀 피부를 감싼다. 유리는 따가운 햇빛에 아미를 살짝 찌푸린 채 핑크색 캡모자를 더 깊숙히 눌러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을 지나쳐가는 처음 보는 사람들, 높다랗게 솟아올라있는 처음 보는 건물들, 길게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서울과는 다른 색깔의 택시들... 모든 것이 낯설었다. 2년 전 여름에 아빠랑 둘이서 해운대로 놀러갔을 때는 아빠차를 타고 부산에 왔기 때문에 유리는 지금 낯선 도시의 그 무엇도 익숙하지 않았다. 처음 보기 때문에? 아니, 아빠와 함께가 아니라서다. 
가희 아줌마에게는 친구들과 놀고 오겠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유리는 지금 부산으로 내려와있었다.

"므라케싼노. 임요화이가 박정석 캐바른다카니까네."

옆을 지나치는 같은 또래 남자애 두 명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부산 사투리를 흘려들으며 유리는 오랜 기차 여행 때문에 몸이 찌푸둥한 것을 느끼며 주변의 벤치로 가서 앉아 팔을 아래로 쭉 내밀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곤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드는 유리. 그녀가 부산으로 내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아빠는 분명히 또 나쁜 사람들을 만나러 간 것이고, 유리는 아빠가 자꾸만 그러는 게 싫었다. 그래서 조그만 꾀를 내어 아빠에게 겁을 줄 생각이었다. 물론 유리도 속시원하게 아빠에게 자신이 다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말하면 그 사실을 숨기고 있던 아빠로서는 적잖은 충격을 받을 것 같았고, 또 만약 자신이 진실을 밝힌 그 대화에서 완벽히 아빠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면 아빠는 그 뒤로는 그나마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도 없이 노골적으로 나쁜 일에 가담하게 될 수도 있었다. 유리는 굳이 그런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좀 더 안전하게. 아빠에게 그런 일을 하는 게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천천히 깨닫게 해주면서 그 사이 아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게 더 좋은 방법이었다. 어쨌든 이런 전화를 하면 아빠는 조금이나마 자기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겠지. 유리는 휴대폰의 1번 버튼을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달구벌파 조경식입니다."

수많은 화환이 장례식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고윤수의 빈소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수도 없이 밀려왔으나 거기엔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의 담소나 웃음소리 같은 것은 일절 없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장례식장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태현 때문이었다. 
태현은 조경식이라 자기를 소개한 30대 후반의 남자를 가만히 응시하며 담배 하나를 입술에 물었다. 그러자 뒤에 서있던 현석이 재빨리 불을 붙여준다. 

"쓰-읍...후우..우......"

잠시 동안 아무런 말 없이 태현은 담배를 태우며, 자신 앞에 공손한 자세로 서있는 조경식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태현의 시선에 조경식은 몸둘바를 몰라하며 시선을 가누지 못했고, 마침내 태현이 눈썹을 긁적이곤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고인과의 관계는 어찌 되십니까."

분명한 존댓말이었지만 그 음성에 서려있는 위압감은 왠지 지금 태현이 반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경식은 태현의 물음에 당황한 얼굴로 즉답을 하지 못했고, 태현은 그제야 빙긋이 웃으며 현석에게 고개를 까닥해보였다. 현석은 자신의 태현이 앉아있는 상 옆에 서있는 길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같은 곳에 서있는 우철이나 길수나 둘 다 얼굴이 온통 피멍이나 상처자국으로 가득했지만, 경식의 앞에 방석을 놓아주는 길수의 움직임에서는 어떠한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길수가 방석을 내어주었음에도 경식은 다시 한 번 '앉아도?'라는 눈빛을 태현에게 보내며 허락을 구했고, 태현은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경식이 조심스레 맞은편에 앉자 태현은 담배갑을 뚜껑을 열어 경식에게 내밀었다. 경식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태현이 내민 담배갑에서 한개피를 꺼내어 입에 물었고, 그러자 재빨리 길수가 경식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쓰읍..' 담배를 빨아들인 경식은 손으로 입가를 살짝 막으며 연기를 옆으로 흘려보냈고, 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 어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저...예.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거...말로만 듣던 분을 실제로 뵙게 되니...하하..긴장이 되어서......"

경식은 웃음을 지으면서도 태현의 눈치를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장례식장 전체는 무거운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장례식장의 입구부터 태현의 부하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장례식장 내부에도 명일과 같은 행동대장들이 희번뜩 치뜬 눈으로 식장으로 들어오는 사람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장례식에 참석한다는 것을 일부러 알려온 태현의 존재감이 너무나 컸다. 간단히 말해서 태현의 그런 연락은 일종의 경고였다. 정태현으로서는 의형의 장례식에 참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각조직에게 알린 것은 만약 연락을 받고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자는 자신의 적으로 돌리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니, 연락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태현으로선 그렇게 받아들이겠다는 의지표명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태현이 암흑가로 복귀했다는 사실과 이어졌다. 이미 길수와 우철을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옮기지 않았을 때부터, 태현은 이렇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한밤중에 이미 윤수의 장례를 열었던 태현이 두 아우를 놔두고 서울로 갔던 것은(물론 유리 때문이다) 다시 부산으로 내려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달구벌파의 큰어른은 박철구 선배님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태현의 말에 경식은 급히 담배 연기를 옆으로 뱉어내곤 대답했다.

"아, 저는 그분의 조카되는 사람입니다. 몇 년 전에 백부님께서 은퇴를 하셔서 제가 조직을 이어받았습니다."
"음...그렇군요. 좋은 분이셨습니다. 제가 백부님께 많은 신세를 졌었지요."
"아, 아닙니다. 오히려 백부께서 선생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지요."

태현은 빙긋 웃으며 경식에게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많이 도와주십시오."
"아, 제가 오히려 부탁드립니다."

경식은 급히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끄곤 두 손으로 태현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태현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경식은 서둘러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저 태현과 마주보고 앉아있었을 뿐인데 경식의 등에는 땀이 흥건했다. 그렇게 경식이 자리를 비켜나고, 태현은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다음번 조직의 보스의 인사를 받는다. 
벌써 수시간째. 오로지 태현이 복귀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수많은 조직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다. 현석은 과거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욱 날카로워진 듯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저마다 내로라 하는 남자들의 머리를 절로 숙이게 만드는 태현의 뒷모습을 감개무량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길수나 우철, 다른 행동대장들도 다르지 않았다. 벌써 8년이나 지났고, 수시간 전까지만 해도 변변한 나와바리 하나 가지고 있지 못했던 태현은 현재까지 주요 대도시의 구역들 태반을 그저 대화만으로 얻어내었다. 이곳에 있는 태현의 측근들 그 누구라도 원래 그 모든 것이 태현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당연한 듯 자신의 것을 찾아내는 태현의 모습은 새삼스럽게 그들에게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남자의 힘을 재확인하게 해주었다. 당연히,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삽시간에 퍼졌던, 지난밤 3배에 가까운 김형필의 조직원들을 물리친 태현의 활약상에 대한 소문이 한몫 거들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세월이 흘러 처음 보는 사람, 아주 오랜만에 만난 과거의 지인 등등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은 태현은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너무 오래 앉아있었던 탓에 뻐근한 목을 두둑두둑 꺾으며 담배를 한대 피워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태현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고 있던 장례식장의 모든 사람들이 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태현은 고개를 조금 가로저으며 앉아들 있으라고 손짓해주곤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현석과 길수가 따랐다. 화장실로 들어온 태현은 쏴아아 시원하게 물을 빼기 시작했고, 그런 태현의 옆쪽에서 길수가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태현의 물줄기가 점점 가늘어지려 할 때쯤 길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님. 일전에 저와 우철이놈에게 하셨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응?"

담배 연기 때문에 눈살을 조금 찌푸린 채 태현이 길수를 돌아보았다. 길수는 꺼내기 힘든 말인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형님께서 기습을 받으셨던 날입니다. 그때 형님께선 저와 우철이에게 형님의 일로 가장 먼저 찾아오는 자가 배신자라고 하셨습니다."
"길수야."

태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검은 먼지가 끼어있는 화장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입술에 물고 있던 담배의 옆틈새로 가늘게 연기를 뿜어내며 태현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이미 윤수 형님을 용서했다."
"...예. 괜한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태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곤 길수의 어깨를 툭툭 쳐주곤 화장실을 나섰다. 그런데 화장실을 나온 태현의 앞에는 우철이 당황을 억누른 표정으로 서있었다. 태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우철을 바라보았고, 우철은 장례식장 안쪽에 힐끗 시선을 주곤 말했다. 

"형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태현은 반쯤 탄 담배를 우철에게 건내주곤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다시 모든 사람이 일어나 태현에게 목례를 했고, 태현은 다른 이들의 그런 반응은 무시하며 자신의 자리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나이는 대략 30대 중반 정도될까, 왠지 이질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왜소한 체구에, 상당히 똑똑해 보이는...한마디로 뭐랄까 인텔리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남자였다. 그는 태현을 보며 빙긋 웃는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곤 간단히 목례를 해온다. 태현은 뒤로 세 아우를 거느리곤 인텔리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당신은 날 속였어. 왕펑이 나와 거래하는 것도 알고 있었지?"

형필은 진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런데 날 찾아온 이유가 따지기 위해서는 아닐 것 같은데?"

진은 형필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책상에 편지 한 장을 탕, 내려놓았다. 

"네 녀석 때문에 나는 부하들도 다 잃고 계획도 다 물거품이 되었다."

형필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에 끼워 빼며 진의 말은 무시하고 편지를 죽 훑어보았다. 그것은 삼합회의 태부가 보낸 편지로, 내용은 대충 사신을 죽이는데 협력해줄 테니 앞으로 이윤의 얼마간을 나누어 달라는 것이었다. 형필은 시익 웃으며 진을 쳐다보았다. 

"삼합회의 태부는 당신보다는 훨 머리가 잘 돌아가는 모양이군."
"현이 죽었으니 나머지 1천만 달러를 내놔라."
"저런."

형필은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계약을 위반했잖아? 내가 암살을 의뢰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는 게 조건이었을 텐데."

형필의 약올리는 말투에 진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진에게 시익 웃어준 형필은 뒤에 서있던 대웅에게 눈짓을 하곤 다시 진을 쳐다보았다. 

"용건은 다 끝났나?"
"......"

진은 아무 말 없이 형필을 노려만 보고 있었고, 형필은 양손을 으쓱하는 제스쳐를 취해보이며 말했다. 

"용건이 끝났으면 그만 죽어주셔야겠군."
"......뭐?"

진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형필을 쳐다보았다.

"나는 지금 삼합회 태부의 사신 자격으로 너에게 왔다. 날 죽이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을 텐데?"

형필은 피식 웃었다. 

"아아. 삼합회의 제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형필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보이며 말을 이었다.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하라고. 왜 태부가 굳이 널 사신으로 보냈는지."
"......!!"

진의 눈동자가 흠칫 떨렸다. 그리고 그 순간,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웅이 철사를 꼬아만든 기다란 줄로 진의 목을 확 낚아채었다.

"크, ?!!"

진은 비명도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며 철사줄을 부여잡은 채 컥컥거렸고, 형필은 천천히 일어나 진의 얼굴에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그동안 내 계획대로 놀아나준다고 수고했다."

진의 눈동자에는 흰자위만이 드러나 있었다. 





"당신은 태부 대인께 빚이 있습니다."
"......"

태현은 자기를 삼합회의 사절이라 소개한 서락이란 이름의 중국인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태현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서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퀸 엘리자베스 호에서 죽인 이 청년은."

그러며 태현의 앞으로 사진 한장을 놓아두는 서락. 사진에는 현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사진을 본 태현의 눈이 살며시 가늘어지고, 서락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 태부 대인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태현은 눈썹을 긁적이곤 말했다. 

"그래서?"
"태부 대인께서 제안을 하나 해오셨습니다."
"......"

태현은 서락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그의 눈동자만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고, 서락은 태현의 눈빛에 조금도 주눅들지 않으며 서류 한장을 태현의 앞에 밀어놓았다. 

"퀸 엘리자베스 호에서 납치된 38명의, 일본을 비롯한 3개 국가 7명의 인질과 31명의 한국인의 신병은 우리가 통제하고 있습니다. 태부 대인께서는 그들 인질과의 교환조건으로 인천과 부산, 두 개 항구의 무조건, 무제한, 무기한 사용권리의 3무조약을 비롯한 이후로 당신의 조직이 벌어들이는 순이익의 30퍼센트를 요구하십니다. 당신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태부 대인께서는 우정으로 당신의 과오를 용서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며, 동시에 이후로 당신의 조직이 관련되는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조약서입니다."
"후우우~......"

서락의 말이 끝나는데 맞춰 희뿌연 연기를 자욱하게 뿜어낸 태현은 조약서라고 책상에 올려져 있는 서류를 집어들곤 뒤쪽으로 내밀었다. 그 종이를 뒤에 서있던 현석이 받아들었고, 태현은 서락의 눈동자만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서락은 태현의 지금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몰라 서류를 받아든 현석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사락의 눈동자가 현석에게로 향한 순간, 현석은 서류를 북북 찢어버렸다. 

"......"

침착하게 시선을 돌려 태현을 바라보는 서락. 태현이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찡그리며 이마의 주름을 몇 번 긁적이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며 서락에게 말했다. 

"11년 전에도 여진악에게 같은 말을 했었다. 이땅의 한뼘도 네놈들에게 넘길 수 없고, 이땅의 단 한푼도 네놈들에게 줄 수 없다."
"...후회하실 겁니다."

서락의 조용한 음성을 무시하며 태현은 명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명일아. 손님 조심해서 모셔다드려라."
"예. 형님."

태현의 뼈가 있는 눈빛을 받은 명일은 곧바로 서락의 뒤에 섰고, 서락은 가방을 챙겨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현은 서락이 하는 목례를 외면한다. 그렇게 서락이 명일의 뒤를 따라 나가고, 태현은 길수와 우철을 보며 말했다. 

"너희 둘은 명일이 좀 도와줘라."
"예. 형님."

길수와 우철도 장례식장을 빠져나가고, 태현은 다른 행동대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철상이 달영이는 다른 루트로 인질들이 어디 있는지 조사해보고."
"알겠습니다."

철상과 달영도 휴대폰을 빼들며 장례식장을 빠져나간다. 태현은 피곤한 얼굴로 눈썹을 긁적였다. 유리의 말이 맞았다. 전후사정은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자신은 (아마도) 김형필의 계략대로 삼합회 두목의 아들을 죽이게 되었고(안타깝게도 유리가 손을 더럽히긴 했지만) 이렇게 삼합회와 다시 악연을 맺게 되었다. 

"현석아."
"예."

태현은 현석을 조용히 불렀고, 현석은 살짝 허리를 숙이며 태현에게로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내가 너무 직선적이냐?"

좀 더 머리를 굴려 삼합회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하며 그들과의 정면대결을 피하는 게 옳았었냐는 물음이었다. 현석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아닙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형님이 옳다고 생각하신 것은 옳은 것입니다. 이곳의 그 누구도 이견을 달지 못할 겁니다." 

현석의 말에 태현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때,

<삐비비비빅, 삐비비비빅...>

태현의 휴대폰이 울려왔다. 





끼긱, 드륵, 빠아앙~!!!

태현의 아반떼가 흰색 BMW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간다.

<야 이 미친새꺄! 운전 똑바로 안 할래??!!!!>

하지만 태현은 다른 운전자의 욕설에 반응할 여유조차 없었다. 방금 전 유리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아빠...어디야? 나 여기에 왜 와있는지 모르겠어. 정신을 차려보니까......'

태현은 온 신경이 하얗게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일단 유리에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되 결코 무리에 섞여있지는 말라고 말해주긴 했지만, 태현은 유리가 걱정이 되어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미 결정한 사실이었지만, 암흑가로 돌아오자마자 유리에게 이런 일이 생겨버리다니 마음 속에는 후회밖에 생기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조금이라도 늦어 유리에게 생채기라도 하나 난다면, 자신은 결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태현이 암흑가로 복귀한 것은 어떠한 단호한 결의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체념이랄까. 자신은 마치 그곳과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어떤 저주 같은 것을 타고난 것 같았다. 그곳에 몸 담아도, 그곳에서 도망쳐 나와도. 자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암흑가와 연결되어버린다. 그래서 태현은 결정한 것이다. 이번에 확실히,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그곳과 완벽히 연을 끊어버리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8년 전 해결하지 못하고 놔둔 문제들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먹어도 결국 최후에 막히는 문제는 언제나 유리였다. 태현은 절대로 유리가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지 못하길 바랬다. 유리에게만큼은 조폭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보여지지 않기를 원했다. 그저 평범한 아빠로. 다른 아이들의 아빠와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아빠로, 그렇게 유리에게 생각되길 바랬다. 그래서 유리가 다른 보통 여자애들이 누리는 평소의 행복을 다 누려주었으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해 소망하던 직업을 가지고 좋은 남자를 만나서 귀여운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아주었으면. 태현이 이 세상에서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태현은 오로지 유리가 그런 행복을 누려주길 바랬기에 유리의 장래에 방해가 될만한 것들은 이번에 모조리 없애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끼이이익...!!

마침내 부산역. 주차금지 구역에 차를 몰아세운 태현은 황급히 차에서 내려섰다. 부산역 앞 광장은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색깔의 표정을 가지고 이리저리 분주히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었다. 태현의 발걸음이 다급하게 광장을 향한다. 그의 눈동자는 가늘게 떨리며 애탄 눈짓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한순간, 태현의 눈동자에 저 멀리 핑크색 캡모자를 깊숙히 눌러쓴 한 소녀가 들어왔다. 긴 생머리, 조그만 얼굴, 하얀 피부와 보기 좋은 몸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손짓, 꼭모은 늘씬한 다리. 몸짓, 손짓, 하나하나가 유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태현은 다른 이의 손길이 타지 않은 듯해 보이는 유리의 모습에 다행스러움과 함께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오르려 하는 것을 느끼며 유리를 향해 달려갔다. 

"유리야...!"

애타는 부정을 가득 담아 딸을 부르는 태현. 그런 그의 부름에 유리의 고개가 서서히 들린다. 급격히 가까워져 오는 아빠를 보며 반가움에 환한 미소를 짓는 유리.

"아빠아...!"

태현은 지척까지 가까워진 딸을 한품에 꼭 안기 위해 두 팔을 넓게 벌렸다. 그런데 그 순간, 태현은 등골이 쭈뼛 서는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한편 그때로부터 20여분 전. 명일의 뒤를 따라 장례식장을 빠져나가던 서락은 휴대폰을 귀로 가져가고 있었다. 잠시간의 신호음이 들리고, 상대방이 응답을 하자 서락은 잠잠한 음성으로 휴대폰 너머를 향해 중국어로 짧게 말했다.

{결렬되었다. 시작해라.}

탁.

간단한 통화였다. 그리고 서락이 휴대폰을 정장 마이 안쪽 호주머니에 넣은 순간, 앞장 서서 묵묵히 걸어가던 명일이 갑자기 발걸음을 우뚝 멈춰세웠다.

"......?"

서락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떠올랐고, 마치 입이라도 맞추기라도 한 듯 명일의 그 신호에 우철이 서락의 뒷목을 수도로 세게 강타했다. 

퍼억...!...스르르...

서락은 그대로 비명도 없이 의식을 잃으며 쓰러졌다.





"꺄악!!"

깜짝 놀란 유리가 터트린 비명. 그것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티딩, 팍!

태현은 유리를 끌어안으며 옆으로 몸을 날렸고, 바로 전까지 유리가 앉아있던 벤치에는 깊숙히 박힌 탄환이 하얀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아, 아빠??"

유리가 황망한 눈동자로 자신을 덮치고 있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태현은 유리의 부름에 답해줄 여유가 없었다. 태현의 눈동자가 급박하게, 놀란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틈을 뚫고 상대방을 찾았다. 그러나 태현이 미처 상대방을 찾기도 전에, 갑자기 두 부녀 앞의 한 청년이 다리에 피를 뿜으며 쓰러진다. 

꺄아아악!!!

"허억..으으윽...!!"

여기저기서 놀람에 찬 비명이 터져나오고, 총을 맞은 청년은 다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청년의 다리에 박힌 탄환의 위치로 총격을 가한 상대의 대략의 방향을 가늠할 수는 있었으나 태현은 좀 더 정확한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보다 고함 지르는 것을 택했다. 

"모두 엎드리십시오!!"

태현의 외침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태현의 얼굴을 알아본 몇몇 사람이 '저거 그 사람 아니가?', '사신이다!' 같은 말을 외쳐왔다. 어쨌든 갑작스런 총격으로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태현의 말에 따르지 않고 급히 우왕좌왕 도망치기 바빴고, 태현은 더 이상의 사람들을 통제하는 말을 하는 건 포기하며 재빨리 유리를 번쩍 들쳐 안곤 자신의 차로 달리기 시작했다. 총알은 3시 방향에서 날아왔다. 태현의 차가 있는 곳은 8시 방향. 

"아, 아빠. 아빠??"

아빠에게 들쳐안긴 유리는 아빠의 목에 팔을 두른 채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한편 태현의 차 앞에는 딱지를 끊으려던 공익근무요원이 갑작스레 소란이 벌어진 부산역 광장을 당황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고, 태현은 차문을 막고 있는 공익에게 버럭 고함질렀다. 

"엎드려!!!"
"......??"

고막을 찢어버릴 듯이 울리는 태현의 고함에 공익은 엎어진 건지 엎드린 건지 아무튼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고 바로 그 다음 순간. 공익이 서있던 공간으로 총알이 뚫고 지나가 차 옆문에 틀어박혔다. 태현은 유리를 조수석에 던지듯이 태우곤 차위를 타고 넘어가며 외쳤다. 

"유리야! 머리 내밀지 마!!"

한편 유리는 지금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은 단지 아빠에게 겁을 좀 주려고 했을 뿐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정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나 누가 자신의 뒤를 따라와 아빠를 노리고 있었던 게 아닌지 걱정이 되어 죽겠다. 만약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유리는 자신이 정말로 증오스러워질 것 같았다. 

척-!!

문을 거칠게 닫으며 차에 탄 태현은 곧바로 시동을 걸며 차를 출발시켰다.

부르릉~부앙~끼기기긱, 부아아아앙~!!!

"아, 아빠. 이게 갑자기 무슨.."
"머리 숙이고 있어!!" 

급출발 하는데 일어난 관성력 탓에 몸이 뒤로 주욱 밀린 유리의 떨리는 음성을 버럭 내뱉은 목소리로 끊어버린 태현은 이를 사려물며 악셀을 밟았다. 

'김형필 그 개자식. 네놈이 정말로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태현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분노로 타올랐다. 태현은 이게 김형필의 짓이라 생각했다. 유리를 몰래 납치해 저곳에 놔둔 뒤 자신을 불러내게 해서 같이 죽여버리려는 수작. 삼합회는 나중에 협상을 하러 왔으니 시간적으로 유리와는 관련되어있지 않다. 그렇다면 태현이 생각할 수 있는 상대는 김형필밖에 없었던 것이다.

'넌 실수한 거다.'

딴 건 다 그렇다쳐도, 태현은 유리를 끌어들인 것만큼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지금 태현의 눈동자는 김형필에 대한 살의로 미친듯이 떨리고 있었다. 

끼이익, 드륵, 부아아앙~!!

한편 태현의 차는 아슬아슬한 곡예운전을 하고 있었다.

"꺄악!!"

정방향 차로가 신호로 막히자 태현은 중앙선을 침범해 차를 몰았고, 유리는 바로 앞으로 돌진해 들어오는 다른 차의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눈을 꼭 감는다. 태현은 이를 악물며 핸들을 왼쪽으로 꺾어 마주오던 차를 피하곤 다시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 정방향 차로로 들어섰다. 힐끗 시선을 움직여 룸미러를 확인하는 태현. 그의 눈동자로 검은색 세단이 들어왔다. 세단의 창문 옆으로는 몸을 차 바깥으로 뺀 어떤 남자가 기관단총을 이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유리야! 의자 뒤로 빼고 누워!!"

유리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아빠가 시킨대로 좌석 레바를 당기며 몸을 뒤로 쭉 눕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 앞유리에 구멍이 생긴다.

쩡, 챙그랑~!

이미 뒷유리는 박살이 나고 있었다. 

투다다다...피빙, 팍, 팍!!

검은색 세단의 무차별 사격으로 태현의 아반떼는 미등이고 범퍼고 죄다 구멍이 나며 덜렁거린다.

"아빠..아빠아..."

유리는 두려움에 떨며 의자에 경직된 몸을 누이곤 애타는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보고 있었고, 태현은 딸의 그 가냘픈 음성에 일순간 마음이 아려와 유리에게 부드러운 웃음을 보여주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아빠가 유리 지켜줄게."

아빠의 따뜻한 음성에 유리는 금세 울먹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흐으..윽..."

'난...바보야...정말로 바보야...'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후상황을 조금도 알 리 없는 유리는 어느 순간부터 지금 아빠가 위험에 처한 것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리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이런 못된 거짓말을 한 것 때문에 양심이 찔리고 아빠한테 미안했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일이 벌어지니 유리는 다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한편 태현은 가늘게 들려오는 유리의 숨죽인 흐느낌에 가슴이 너무나 아파왔다. 이런 아빠를 만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유리는 도대체 몇 번의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되는 것일까. 태현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삼키며 핸들을 옆으로 확 꺾었다. 

끼기기기기긱!!!

차는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지며 급격히 방향을 바꾸어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곳은 3차선 도로 정도 너비의 주택가 골목길이었는데, 이런 곳이면 으례 그러듯 차들이 일렬로 길게 줄을 서서 벽에 딱붙어 주차되어 있었다. 태현의 눈동자가 급박하게 좌우로 움직인다. 그렇게 대략 1, 2초간이 흘렀을까, 태현의 눈동자에 정확히 소형차 1대가 들어가면 딱맞을 길이의, 그러나 앞뒤 주차된 차 사이의 공간이 그리 넓지 않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주차가 불가능한 길이의 공간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을 본 순간, 태현의 눈동자에 망설임이란 떠오르지 않았다. 힐끗 룸미러에 시선을 주어 아직 검은색 세단의 모습이 거울에 비춰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태현.

"유리야! 꽉잡아!"

유리는 시트를 꼬옥 부여잡으며 눈을 꼭 감았고, 태현은 핸들을 급격히 꺾으며 클러치와 브레이크를 밟음과 동시에 핸드브레이크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태현의 차는 앞부분을 중심으로 뒷타이어가 연기를 피워올리며 차뒷부분이 빙글돌았고, 태현은 곧바로 이어진 연결 동작으로 핸드브레이크를 도로 내리며 클러치에서 발을 뗏다. 

끼기기기긱!!!

정확히 벽에 딱붙게 쑥 밀려들어가는 아반떼. 아반떼와 앞뒤에 주차된 차와의 거리는 불과 10cm도 떨어져있지 않다. 태현은 곧바로 시동을 끄며 유리와 마찬가지로 의자를 뒤로 눕혀 몸을 숨겼다. 태현의 이마에는 송골땀이 맺혀있다. 그러나 태현은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긴장감에 물든 눈빛으로 창밖을 빼꼼히 주시하며 태현은 기다렸다. 그리고 불과 10여초가 흘렀을까, 총을 든 세 명의 남자를 태운 검은색 세단이 태현의 아반떼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휴우..우......"

태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제야 유리를 돌아보았다. 유리는 자신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태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유리의 얼굴을 어루만져주었다.

"흐으..윽..."

그러자 유리가 금세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자신을 어루만져주고 있는 아빠의 손을 꼬옥 잡는다.

"미안해...아빠아......"

태현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어주었다. 

"아냐...유리가 아빠한테 미안할 게 뭐있어..."
"흐윽, 아냐...나 사실...거짓말 했던 거였어...누구한테 끌려오거나 한 게 아니야...나 기차타구 부산으로 와서...아빠한테 거짓말로 전화한 거였어......"
"......"

유리의 말에 태현의 입술에서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러나 태현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화가 난 표정이 아니었다. 태현의 눈동자는 유리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니? 우리 유리...아무한테도 손찌검 받거나 한 거 아니지...?"

유리는 미안함과 자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태현은 몸을 기울여 유리를 품에 꼭 안았다. 지금 태현의 머릿속은 어째서 유리가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오직 딸이 아무에게도 위협을 받지 않았었다는, 아무도 유리를 노리지 않았던다는 것에 대한 다행스러움만이 가득했다. 

"미안해...미안해 아빠......"
"아니야. 유리야..."

태현은 애정이 가득 담긴 손길로 유리를 보듬어주었다. 한편, 태현은 방금 전의 검은색 세단을 떠올렸다.

'김형필이 아니다.'

그렇다면 삼합회였다. 이것도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 서락이란 자는 자신이 제안을 거절하는 경우에 대비해 미리 기습조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자신은 유리의 전화를 받고 나왔고, 그 뒤를 기습조가 따라온 것이다. 물론, 그 기습조가 이미 삼합회와 결탁했을지도 모를 김형필이 보낸 것일 수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분명한 것은, 이제 자신은 김형필과 삼합회. 두 세력 모두를 적으로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태현은 머릿속이 복잡한 것을 느끼며 유리를 토닥여 품에서 떼어놓곤 휴대폰을 꺼내어 현석에게로 전화했다. 
한편 같은 시간. 명일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요."

장례식장의 어느 창고 구석. 의자에 묶인 채 서락은 입술이 터져 피를 흘려내리고 있었다. 그 주위를 명일과 길수, 우철이 둘러싸고 있다.

"너 이 새끼 무슨 수작이야?"

명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본격적인 고문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술술 정보를 불어버리는 이 남자. 왠지 모르게 뭔가가 불안했다. 명일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서락에게 툭, 튕겨버리며 길수에게 말했다. 

"이 새끼가 말한 곳에 정말로 인질들이 잡혀있는지 애들 몇 명 보내서 알아봐라."
"예."

길수가 창고를 빠져나가고, 명일은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서락의 볼을 탁탁 몇 번 치곤 답답한 콧김을 푹 내쉬었다.





"난 유리와 같이 좀 있어야할 것 같다."
"예. 형님."

지금 태현은 현석을 대동한 채 유리를 데리고 시내의 한 호텔에 와있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는 태현의 눈빛을 알아들은 현석은 곳곳에 바람구멍이 나있는 아반떼가 세워져 있던 그곳부터 지금까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그것은 발걸음을 돌려 호텔방을 빠져나가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태현은 현석이 나가자 천천히 문을 닫곤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퀸 엘리자베스 호에서 피랍된 38명의 인질들의 소재는 수일이 지난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당국은......>

유리는 침대 위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채 고개를 폭 수그리고 있었다. 기분 좀 전환하라고 틀어준 TV에서는 또 이건 무슨 경우인지 안 좋은 뉴스를 흘려보내고 있다. 태현은 TV를 꺼버리곤 유리의 옆에 천천히 걸터앉으며 그녀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유리야. 많이 무서웠지?"
"......"

살며시 고개를 도리질 하는 유리. 태현은 유리를 품 안에 꼬옥 끌어안았다.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말이라고 해봐야 아까 전 일에 대한 것뿐인데 그건 유리에게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태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리도 그저 아빠의 품에 안긴 채 고개만 무릎에 묻고 있을 뿐이다. 태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비록 유리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태현은 아까 전 차 안에서 보았던 유리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겁에 질려서 꼼짝도 못하고 있던 모습. 

"유리야..."

태현은 애타는 가슴으로 유리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 여린 소녀에게 자신은 지금 무슨 경험을 겪게 하고 있는 것일까. 김형필, 삼합회, 테러범 등등...그들보다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유리가 자신의 딸로 태어난 것 때문에 이런 고통스런 기억을 가져야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얼마동안 그렇게 유리의 등을 쓸어주고 있었을까. 유리가 가진 무서운 기억에 대한 상처를 자신이 대신 가져주었을면 하는 애타는 바람으로 유리를 어루만져주고 있던 태현의 귓가에 나지막한 딸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쓸모 없는 애야."
"......??"

갑작스런 유리의 말에 태현의 눈동자가 아픈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유리는 어여쁜 얼굴을 무릎에 묻어 아빠에게 보여주지 않으며 다시 가느란 음성으로 태현의 가슴을 찢어놓는다.

"아빠에게...짐이 될 뿐이야. 난...하아, 흐..윽...난 왜 자꾸만 아빠를 힘들게 만드는 걸까...?"
"유리야아..."

태현은 유리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몰라 애타게 유리를 품에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그런 태현의 뇌릿속에 아까 전 유리가 했던 말이 스쳐지나간다.

'......나 사실...거짓말 했던 거였어...누구한테 끌려오거나 한 게 아니야......'

태현은 두 눈을 꽈악 감으며 슬픈 얼굴로 유리의 머리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쓸어주었다. 유리가 자신에게 그런 거짓말을 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배에서의 일도 아직 다 잊혀지지 않았는데 아빠는 자기와 같이 있어주지 않으려하니 괜한 심술이 났던 것일 거다. 그래서 아빠인 자신을 골려주려 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때 자신의 뒤를 따라온 기습조가 총격을 가해왔다. 그런데 유리는 그게 자길 뒤따라온 어떤 사람들이 공격을 한 것이라 오해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리로서는 동료를 잃은 테러범들이 앙심을 품고 기회를 옅보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들을 자기가 아빠에게 안내하게 되어버렸다고...
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유리 때문에 자신이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유리가 위험에 처했었다. 다 자신 때문이다. 배에서의 일도 그렇고 아까 전의 일도. 유리가 친구들과 마음껏 방학을 즐기지 못하는 것도 다 자신 때문이다. 

"아니야...유리야. ...그런 게 아니야......" 

유리는 아빠의 애달픈 가슴을 알고 있는 것일까. 유리는 슬픔에 물든 얼굴을 살며시 들어 아빠를 바라보았다. 사랑스런 얼굴에 번진 눈물이 태현의 가슴을 저며오게 만든다.

"그치만... 그치만 나......난 이기적이 아이라서...그래서 이렇게 자꾸만 아빠를 힘들게 하면서도...그러면서도 아빠의 곁에 있고 싶어......아빠의 사랑을 좀 더 많이 받고 싶어......"
"유리야..."
"제발...날 미워하지 말아줘......"

가슴을 시려오게 만드는 유리의 목소리. 태현은 울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유리를 가슴 깊이 끌어안았다. 말로써는 안 되었다. 유리를 아프게 하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줄만한 말주변을 자신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태현은 견딜 수 없이 슬프고, 안타까웠다. 자신은 유리에게 이런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다. 언제나 상처만 주고, 그걸 치료해줄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데도 유리는 아빠를 이렇게나 사랑해준다. 

"유리야...내가...아빠가 유리 널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니...?"

어느새 태현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있었다. 아빠의 애틋한 음성에 유리가 마침내 무릎을 감싸고 있던 팔을 풀어 태현의 목에 두른다. 유리는 가슴에 사무치게 사랑하는 아빠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태현은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런 딸의 맑은 눈동자를 애타게 응시한다. 

"조금만...아빠를 조금만 덜 사랑했다면...그랬다면 난 분명 행복했을 거야......"
"유리야..."

무슨 말을 해줘야 좋을지 몰라서 태현은 그저 유리의 이름을 불러줄 뿐이었다. 

"한 번만 더..."

특별히 태현이 자신의 이 애타는 가슴을 알아주길 바라는 소원을 목소리에 담아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간절한 사랑은 유리를 향한 태현의 모든 말 속에서 묻어났고, 그 애달픈 깊이는 유리의 마음 속에 닿지 않을래야 닿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만히 아빠의 이마에 자신의 반듯한 이마를 기대어가는 유리.

"한 번만 더 불러줘...이름......"

유리의 애틋한 그 음성에 태현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졌다. 태현은 자신의 눈동자 속 한가득 들어와있는 유리의 커다란 눈망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똑같은 말을 속삭여준다.

"...사랑해......"
"흐..윽..."

유리의 입술이 가느란 흐느낌으로 태현의 청각을 마비시킨다. 그가 오로지 자신밖에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는 그 어떤 마력... 유리의 눈동자에 힘겨운 소망이 떠오른다.

"허락...해주면 안 돼...?"
"......"

대답을 알려주지 않은 물음이었기에 태현은 가만히..부드러운 손길로 유리의 얼굴을 소중히 감싸는 것으로 그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들어주겠다는 대답을 대신 해주었다. 마치 너무나 쉽게 깨져버리는, 그러나 너무나 소중해서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해보지 못했던 보석을 처음으로 만지는 것만 같은 손길. 유리도 알고 있었다. 아빠가 말을 잘하는데 그리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잘 포장된 거짓말보다 서투른 진심이 더 좋으니까. 그런데 아빠는 그저 서투른 것이 아니었다. 백마디 말보다 더 가슴을 깊이 녹이는 진심을 말이 아니라 손길로 전해줄 줄 알았다. 유리는 지금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아빠의 손길에서 그 사랑을 느꼈다. 그 사랑에 용기가 생긴다. 가슴 가득 생겨난 용기는 간절한 바람이 애타는 음성으로 바꾸어 태현에게로 도달하게 만들었다. 

"아빠와...하나가 되고 싶어......"
"......"

유리의 눈앞을 아른거리게 만드는 목소리.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소원이라고는 해도 태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태현의 눈동자는 조금의 변화도 없이 한결 같은 사랑을 담아 유리를 보듬어주고 있었고, 부드러운 그의 손길은 여전히 유리의 조그만 얼굴에 스스로의 체온을 전해주고 있다. 어째서일까, 유리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흘려나오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는 거절에 대한 무서움을 억누른 간절함이었다.

"나...나아 정말로 아빠가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할게."
"...유리야."
"저..정말이야. 아빠한테는 아무 피해도 가지 않게 할 테니까...아??"

흠칫 커지는 유리의 눈동자. 아빠에게 갑작스레 와락 껴안긴 유리는 서서히 입꼬리를 내리며 울먹였다. 

"...아빠의 여자가 되고 싶어...아빠만의 소유가 되고 싶어......그래서...아빠가 날 버릴 수 없게...아빠가 날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싶어......"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태현이지만, 아직 가슴을 칼로 도려내어진 경험은 없었다. 그러나 태현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가슴을 칼로 난도질 당해도 이보다 더 아플 수는 없을 것이다. 어째서 유리는 자신의 사랑이 영원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몰라주는 것일까. 그러나 이미 태현은 알고 있었다. 
거절. 거부. 다음에. 나중에. 크고 나면...
일요일 아침에 같이 만화영화를 보자는 유리의 부탁 대신 5분의 잠을 택했고,
주말에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는 수요일날 했던 유리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주말 내내 현석과 낚시를 즐겼고,
그리도 같이 자고 싶어했던 유리를 방에서 쫓아내었으며,
아빠의 사랑을 느끼고 싶어...아빠가 자신을 깨끗히 씻겨주었으면 좋겠다는 유리의 바람을 무시하며 같이 목욕하는 걸 꺼려했고......
엄마에게 받을 사랑을 잃어버린 유리의 여린 마음을 너무나도 부족한 사랑으로 아프게 만들어버렸다.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는데......'

베풀어줄 사랑을, 유리에게 베풀어줄 사랑을 자신은 이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어리석은 자신은 사랑을 표현하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서툴러서 유리가 이런 깊은 상처를 가지게 만들어버린 것일까. 
가만히 유리의 얼굴을 자신의 품속에서 밀어낸 태현은 조심스런 손길로 유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곤 애틋한 사랑을 가득 담아 속삭인다.

"유리가 원하는 거...다 들어줄게...유리가 해달라는 거...아빠..다 해줄게......"

그래서 이 소녀의 아픔이 조금이나마 치유될 수 있다면. 유리가 조금이나마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태현은 그 어떤 죄라도 저지를 수 있었다. 그것이 비록 친딸을 범하는 씻을 수 없는 죄악이라고 할지라도. 아내의 무덤 앞에 다시는 설 수 없는 부끄러움을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하늘이 자신에게 어떠한 벌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유리만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달게 받겠다. 이 사랑스런 소녀를 범함으로 인하여 자신이 받게 될 그 어떤 벌이라도, 그것이 자신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들지라도. 피하지 않고 달게 받을 것이다. 

"정말..이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커다란 눈망울을 가늘게 떨며 아빠를 바라보는 유리. 태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유리를 사랑하니까......" 
"아빠아......"

유리는 아빠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크하하핫!! 이거 말이 통하는 친구이구먼 그래.}

홍콩의 어느 고급 룸싸롱. 그곳의 VIP룸에는 세 명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오히려 제가 간곡히 부탁드려야 될 일인 것을요. 태부 대인께서 도와주신다면 제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형필의 말을 소파 뒷편에 허리를 살짝 굽히고 서있던 통역사가 그대로 여진악에게 전해주었다. 여진악은 껄껄 웃으며 형필의 등을 팡팡 쳤다.

{크하핫! 너무 그리 아부를 떨 필요는 없네, 형필 소형제. 그래. 내가 해줄 건 이 계집년을 데리고 오는 것뿐인가? 다른 거 더 도와줄 건 없고?}

두 사내 앞의 테이블에는 너무나도 어여쁜 한 소녀가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걸어가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다시 통역사가 여진악의 말을 그대로 한국말로 전달해주었고, 형필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알려드린 주소지에 부하들을 잠복시켜 두시다가 사신이 집을 비운 사이 데리고 오게 하시면 됩니다." 

고개를 살짝 기울여 통역사의 통역을 들은 여진악은 시익 웃으며 사진을 집어들었다. 

{이것 참 귀여운 소녀로군. 헌데, 이리 쉬운 일을 왜 굳이 나의 손을 빌려서 하는 겐가? 나는 자네가 선뜻 내 제안을 수용하기에 좀 더 어려운 부탁을 해올줄 알았는데 말이야.}

형필은 빙그레 웃으며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 태부 대인께 많이 가르침을 받을 입장으로, 처음부터 대인께 어려운 부탁을 드릴 수야 없는 일이지요."
{무어? 크하하핫!! 이거 내가 호랑이 위에 올라탄 게 아닌가 걱정이 되는군. 우하하핫!!}

삼합회의 태부(보스), 여진악은 지금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비록 사신과 김형필, 두 세력 모두와 협상을 맺고 그들을 잘 조율하며 잇속만 차리려던 계획은 사신의 거절로 물거품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두 세력 중 보다 무게를 두었던 김형필이 이렇게 연락을 받은 그날 바로 홍콩까지 날아와 극진한 예의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다는 부탁이라고는 사신의 딸만 납치해서 가두고 있는 인질들과 함께 데리고 있으면 된단다. 그러며 그렇게 해달라는 이유가 자기가 사신을 처리할 때의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보험을 들어놓기 위함이라고 했다. 물론 산전수전 다 겪은 여진악은 김형필이 분명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자기 자신이 피해를 볼 일은 어찌 생각해도 없었기에 김형필의 부탁에 순순히 응해주기로 했다. 
한편, 형필은 기분 좋은 듯 술잔을 들이키는 여진악을 바라보며 은밀한 조소를 지었다. 지금 저 남자는 자기가 어떤 일을 떠맡았는지 조금도 모르고 있다. 형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내를 잃었을 때 정태현이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를. 따라서 알 수 있었다. 딸을 빼앗겼을 때 정태현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어 여진악에게 건배를 청하는 형필.

'어느 쪽이 이겨도 상관없다.'

어차피 살아남은 쪽도 극심한 피해를 입을 것이니까. 

챙~.

{크하핫!}

형필은 시원스런 웃음을 터트리는 여진악에게 빙긋 미소를 보내며 독한 양주를 한모금 마셨다. 

{자. 자. 복잡한 얘기는 여기서 끝내고, 내 형필 소형제를 즐겁게 해주겠네. 여봐라! 들어오라고 해라!}

여진악은 형필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렇게 말했고, 형필은 통역사를 힐끗 돌아보았다. 통역사는 형필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해주었다. 

"태부 대인께서 여자를 부르셨습니다."

달칵...

통역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룸의 문이 열리며 네 명의 색기가 좔좔 흐르는 미녀들이 들어왔다. 형필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미녀들을 보며 일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냄새나는 중국년들을 감히 누구에게...'

{크하핫! 사양 말게나 형필 소형제.}

여진악은 형필의 어깨를 꽉꽉 잡으며 그렇게 말했고, 형필은 눈빛이 살아있는 얼굴로, 그러나 태도는 공손하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해야할 일이 많이 남아있어 송구스러우나 저는 이만 자리를 떠야겠습니다."

온화한 미소 속에 감춰진 형필의 왠지 섣불리 대할 수 없게 느껴지는 눈빛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여진악은 통역사의 전언을 듣곤 너털 웃었다. 

{허헛, 그래? 뭐, 하긴 사신을 상대해야 하니 준비할 것이 많겠지.}

여진악은 쉽사리 형필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형필은 여진악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여보이곤 자존심 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녀들을 지나쳐 VIP룸을 나섰다. 그곳에는 형필이 대동하고 온 대웅을 비롯한 세 명의 주먹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형필은 앞장서서 걸어가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즉시 오늘 고윤수 장례식에 참석한 조직들 명단 짜오고, 오늘 밤에 이의원, 김장군과 만날 약속 잡아놓아라. 그리고 삼합회 간부 몇 명 매수해서 저 떼놈 새끼 담글 준비해놔."

형필은 여진악이 자신의 어깨를 함부로 건드린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한편 형필이 빠져나가고 나자마자 여진악은 좌우 사방으로 미녀들을 끼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 사신을 놓쳤다고? ...쩝,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녀석은 살아남는데는 도사로군. 일 좀 쉽게 풀려나 했더니 아쉽게 되었구만. 그래, 서락은 어찌되었나.}

부하와 통화를 하고 있는 여진악의 옆에서는 미녀들이 마리화나를 피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중 여진악의 옆구리에 들러붙어있던 미녀가 마리화나 연기를 입 안 가득히 품곤 매력적인 입술을 여진악의 두껍한 입술에 끈적하게 붙여간다. 여진악은 기분 좋은 듯 시익 웃으며 미녀가 먹여준 연기를 폐속 깊숙이 삼킨다. 그는 그러며 부하의 얘기를 들으면서 다른 미녀 하나를 끌어와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혔다. 미녀는 농염하게 치뜬 눈으로 여진악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여진악의 바지 지퍼를 내려간다. 여진악은 그 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핫! 역시 서락이 억류 되었다고? 큭큭큭...괜찮다. 놔둬라. 다 서락의 계획대로니까. 그보다, 너희들이 해줘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츄우웁...

여진악의 거대한 양물이 미녀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서서히 사라져간다. 여진악은 찌릿찌릿한 쾌감을 즐기며 얘기를 계속해서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