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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얀 피부의 소녀

1980년 늦은 가을 겨울을 재촉하는 찬 바람이 스산하게 몰아치는 골목길엔 
여기저기 연탄재와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다. 빼곡히 늘어서 있는 초라한
판자집들 앞에서 콧물을 흘려가며 놀고있는 아이들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초라하고 꽤재재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유난히 피부가 흰 여자애가 
있다.그 자그마한 여자애의 이름은 유 경숙, 그 해 15살 중학교 2학년의
학생이다.
"야! 이 쌍년아...서방이 술을 사오라면 사올것이지 뭔 말이 그리 많아.
이 개같은 년아.. 빨리 안 사와."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돈이 없어서 밥도 굶고 있는 판에 무슨 술타령이야.
미친놈아 나가서 돈이나 벌어와봐. 내가 서방대접 안해주나."
"뭐야 이 씨발년이 엇다대고 욕지거리야, 눈에 뵈는게 없나."
욕을 하면서 싸워대고 때리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시끄러운 소리가 경숙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지만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경숙의 표정은 
무덤덤하고 동요가 없다.이미 그녀에게는 생활의 일부처럼 되버린 부모의 
싸움은 더 이상 그녀에게 어떤 동요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다만 중학교 3학년인 그녀의 오빠만이 울부짖으며 엄마를 때리는 아빠를
말리고 있을 뿐이다. 유 경철, 어려서부터 엄마의 사랑을 끔직히 받아온
그에게 맞고있는 엄마의 모습은 참기 힘든 고통이면 분노였다.
'난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거야...'
경숙의 머릿속엔 오로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 날 저녁, 한바탕 집안을 때려 부시고 아버지는 집을 나가고 38살의 
엄마 강민자와 오빠 유경철 그리고 경숙이 셋이서 김치하나를 놓고
저녁을 먹고 있다. 그나마 엄마가 파출부일이라도 나가는 덕분에 김치라도
놓고 밥을 먹을 수 있는것이다. 침묵속에서 묵묵히 밥을 먹던 중, 문득
엄마가 경숙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낸다.
"저기 경숙아. 너 경자 이모 알지? "
경자이모는 엄마의 사촌언니이다. 경자이모부는 부동산투자를 시작해서 
돈을 꽤 모으고 남부럽지 않게 살지만 워낙에 구두쇠라 경숙의 집에
한 푼도 도움을 준적이 없다. 말이 이모지 사실은 남보다도 더 못한
그런 사이의 친척이다.
"왜....?"
"며칠 전에 경자이모가 주인집으로 전화를 해와서 통화를 했는데 너만
괜찮다면 이모네 집에서 같이 살자는구나. 그래서 안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네 의사를 한 번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순간 경숙의 머리에 언젠가 한 번 가본 이모네 집이 떠오른다.
정원이 있고 이층으로 만들어진 양옥집이......
"왜 나를 오라 그러는거야?"
"응 이모가 요즘 몸도 아프고 그래서 네가 와서 집안일도 도와주고
그러면 이모도 편하고 너도 이 지긋한 동네에서 벗어나서 사람답게
살 수 있어 좋지 않냐는 거지. 이모가 학비도 다 대주고 공부는 계속
시켜준다고 하니까 집안일만 좀 거들어주고 좋은 집에서 공부 열심히
하면 너한테도 좋을거 같다. 경숙아..."
"엄마도 너랑 떨어져 살긴 싫지만 너를 위해서는 오히려 그 편이 더 
나을거 같구나,,"
눈물을 글썽이며 얘기하는 엄마를 보니 경숙의 속에서도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오르지만 쉽게 울지않는 경숙은 눈물을 참으며 아주 간단하게
말한다.
"정말 가도 된다면 나 거기 가서 살께."
"싫어 가지마.... 엄마 경숙이 보내지마..그냥 우리끼리 같이 살자.."
착하고 순하기만한 경철은 경숙을 보내기 싫은지 울먹이며 반대한다.
"엄마 나 이모네 가는거 아빤 알아?"
"애비라고 부르지도 마 그인간, 그인간은 몰라도 돼..어차피 관심도
없을꺼니까.."
그렇게 간단하게 중대할 수 있는 문제가 결정되어지고 다음 날 경숙은
이모네 집으로 떠난다. 

"아유 왔구나. 어서와 우리 경숙이 많이 이뻐졌네. 처녀 다 됐어."
약간은 뚱뚱한 이모가 호들갑을 떨며 반갑게 맞이한다.
"이모 안녕하세요."
"언니네는 여전히 좋구나... 형부는 집에 없어?"
"응 회사 나갔지.."
엄마와 이모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경숙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앞으로 자기가 살 집을 살펴본다. 역시 경숙이 꿈꿔오던 그런 집이다.
하지만 경숙은 앞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사건들을 예감하듯이 왠지 모를
불안감과 긴장감이 자신을 짓누르는걸 느낄 수 있었다.
얼마 후 ,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쉬운 듯 경숙을 쳐다보며 갈 채비를
한다. 이모도 문 앞까지 따라나올듯 하자
"아냐 언니 나오지마.. 나 그냥 갈께 경숙아 이모를 엄마라고 생각하고
이모 말씀 잘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래야 한다."
"알았어. 걱정하지마 엄마."
"그래 엄마 간다.."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서서 나가는 엄마의 뒷 모습에서 경숙은 엄마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불쌍한 엄마....

경숙은 이모가 이끄는대로 2층의 조그만 방으로 들어섰다.
덩그러니 옷장하나만 있고 한구석에는 이부자리가 놓여져있었다.
"경숙아 자 이게 앞으로 네가 지낼 네 방이다."
경숙은 그 좁고 초라한 방이지만 자신만의 방이라는 생각에 너무도 좋았다.
"이모! 고맙습니다. 앞으로 이모말 잘 듣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방이 좀 좁지만 방이 이것밖에는 없구나. 가구는 영미가 쓰던 책상
을 가져다 줄께. "
"네"
2층에는 화장실 하나와 경숙의 방을 마주보고 고3인 사촌오빠 영호의 방이
있었고, 옆으로는 대학생인 사촌언니 영미의 방이 있었다.
이렇게 경숙의 새로운 생활은 시작되고 있었다.